검은 패딩을 입은 남자
퇴근이 늦었다. 사무실을 나서면서 경의중앙선 시간표를 검색해 볼 만도 한데, 그렇다고 전철 시간에 맞춰 더 있기도 싫은 터라 그냥 사무실의 불을 모두 끄고 나와버렸다. 그렇게 수색역에 도착해 운이 좋으면 금방 전철을 타는 것이고, 운이 나쁘면 30분까지도 기다리게 된다. 그날은 운이 나빴다. 플랫폼으로 내려가며 계산을 해봤다. 오늘 퇴근 시간은 두 시간 반이 걸리겠구나. 종종 있는 일이다. 하염없이 30분을 기다려 전철을 탔다. 사람이 별로 없다. 어중간한 쌀쌀함에는 전철도 난방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람도 없으니, 온몸이 식어간다.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를 가면 서늘한 공기에 몸이 경직된다. 그렇게 양수역에서 내렸다. 안 그래도 냉골에 시달리다 내린 양수의 공기는 수색보다 더 차갑다. 춥네.... 그런 말을 구시렁거리며 역사 밖으로 나섰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에스컬레이터가 끝나는 지점, 검은색 패딩의 지퍼를 턱까지 단단히 올린 남자가 보였다. 그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그 남자 옆을 지나쳐 역사를 벗어나려는데 남자는 나를 따라왔다. 안녕하세요. 그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키가 컸다. 입고 있는 검은색 패딩은 가까이서 보니 많이 낡아 있었다. 바지는 두툼한 트레이닝복이었다. 깨끗했지만 역시 낡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안녕하세요. 그는 나에게 한 번 더 인사했다. 나도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했다. 누구더라.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중년의 남자였는데 얼굴이 정말 하얬다. 그리고 눈동자 색이 밝았다. 가로등이 제대로 없는 역 광장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밝은 갈색인 것 같았다. 난 대뜸 인사하는 그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 그냥 내 갈 길을 가기로 했다. 그때 그 남자가 휙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더니 내 옆으로 와서 나란히 걸었다. 누구지? 가만히 보니 덩치가 꽤 컸다. 난 걸으면서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년의 나이라기엔 이상할 정도로 창백한 남자의 피부가 거슬렸다. 그 남자는 나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 절 왜 이렇게 싫어하세요. 그래봐야 5분밖에 안 되는데. 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저벅저벅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가며,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라고 물었다. 남자는 그제야 얼굴을 내 쪽에서 정면으로 돌리더니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 남자 입에서는 입김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계속 공영주차장으로 걸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철제 계단에서 나를 따라오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간 건가? 다 내려가니 다시 그 남자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처음 보는듯한 남자가 나를 따라온다는 공포보다, 그 남자가 내 옆에 붙어있는데도 한기가 여전하다는 것이 더 기이했다. 이젠 3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차를 향해 걷는 나에게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아도 된다구요. 안 그런가요? 그때 난 그를 향해 돌아봤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하얀 얼굴로 웃고 있었다. 하얀 치아가 하얀 피부보다 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눈동자는 어쩌면 밝은 회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눈동자 색도 있었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 앞에 내 차가 있었다. 난 문을 열고 차에 앉았다. 그런데 조수석 문이 열리더니 그 남자가 내 차에 타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실례지만 저 아세요?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모셔다드려요? 이상하게 그에게서 위협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그 사람 집까지 데려다주고 떼어내고 싶었다.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었다. 오래된 차가 덜덜거리며 예열했다. 어디 가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거기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차도 끊겼고, 날도 추우니까요. 그는 답하지 않고, 차가 참 오래됐네요, 녹도 슬고... 히터도 낡은 건지 차도 계속 차갑네요. 그가 낮게 깔낄 웃었다. 출발하세요. 이 정도면 예열도 됐고. 어이없었지만 난 그의 말대로 출발했다. 그러자 그가 나를 향해 온몸을 돌리며 말했다. 사실 흰 눈 내린 풍경은 좋아했잖아요. 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기에 난 흰 패딩을 입은 그를 봤다. 이 사람 패딩이 흰색이었던가? 검은 색인 줄 알았는데. 집까지 가는 길 슬슬 차 안에는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봐요, 기껏해야 5분이라니까. 다시 검은 패딩을 입은 그 남자가 말했다. 이상하게 그 남자의 몸이 급격하게 왜소해져 있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가능한 최대로 친절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할 필요는 없다구요. 하늘에는 오리온도 있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사라졌다.
난 조금 더 차를 몰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시동을 껐다. 조용해진 차 안.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집에만 있거나 사무실에 있을 때 겨울을 싫어할 이유는 없다. 추우면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매일 할 수밖에 없는 출퇴근. 그중 퇴근 후 양수역에서 내려 주차장에 놓인 얼어붙은 차까지 걸어가는 겨울밤 그 5분의 시간이 난 그렇게 싫었다. 그 남자 말대로 흰 눈의 풍경은 여전히 좋아하고, 명징한 오리온자리가 보이는 겨울 하늘도 좋아한다. 하지만 지친 몸에 한기가 파고들고, 차의 히터는 금방 작동하지 않는 그 5분의 추위가 싫은 것이었다. 난 그것을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짧은 시간이 아닌가. 그걸로 겨울을 퉁치기에는 겨울이 좀 억울할 수도 있었을까.
겨울이 이미 내 옆에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