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 스코어 믹스 테이프 15곡
음악에 대한 자주적인(?) 취향의 시작은 영화음악이었다. 그중에서도 스코어. 이는 당시뿐 아니라 지금 기준으로도 굉장히 마이너한 음악 취향이다.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온갖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지만 “영화음악이요, 아니 가지 마시고요, 아직 제 말이 다 안 끝났는데 어딜 가세요, 그중에서도 스코어랍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1,000명에 한 명 나올까 말까인 것이다. 내가 그 한 사람이었다.
“저 잠시만요, 그런데 스코어가... 뭔데요?”
당시(라고 하면 1980년대 후반을 말한다)에는 라디오에 영화음악실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영화음악이 제법 유행이었고 나도 열심히 들었다. DJ가 다음 곡은 영화 <탑건>의... 하면 둘 중 하나다. 베를린의 ‘Take My Breath Away’이거나 케니 로긴스의 ‘Danger Zone’. 그러나 내가 카세트에 공테이프를 걸어 놓고 녹음하려던 곡은 주제곡이 아니라 영화 처음에 흘러나오던 그 기타 연주, ‘Top Gun Anthem’이었다. 정말 어쩌다 그 음악이 소개되면 난 후다닥 일어나서 ‘녹음’과 ‘일시 정지’ 버튼이 모두 눌려 있는 상태에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해제해) 녹음을 시작했다. 이게 곡과 곡 사이에 잡음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렇게 스티브 스티븐슨의 기타 연주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내 공테이프로 들어갔다.
영화음악 스코어에 대한 내 취향을 이야기해 보자,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음악이 바로 ‘Top Gun Anthem’이었고, 그다음부터 의식의 흐름처럼 15개의 스코어를 순식간에 유튜브에서 검색했다. 지금부터 레터에 소개할 음악들이고 그 순서와 선택의 이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코어, 그런 게 아니다. 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장 처음 생각난 ‘Top Gun Anthem’, 다음으로 2025년 10월 26일 밤에 순차적으로 떠오른 음악들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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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스코어에 대해 가장 처음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미지와의 조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음계였을 뿐 음악은 잘 몰랐으며, 그로부터 몇 년 후, 난 같은 감독의 <이티>라는 영화를 극장에서 보며 엘리엇이 이티를 자전거에 싣고 공중으로 휙 날아오르는 장면에서 미칠듯한 쾌감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순간 뒤로 들리는 음악을 기억했다. 존 윌리엄스의 ‘Flying’이었다. 영화음악의 스코어에 대한 첫 인지가 아닐까 지금은 그렇게 기억한다. 존 윌리엄스의 수많은 음악 중 하나를 더 꼽으라면 난 늘 <쥬라기 공원>의 ‘Theme from Jurassic Park’를 선택한다. 샘 닐이 브라키오사우루스를 처음 목격하고 로라 던의 머리를 잡고 돌리던 순간부터 흐르는 웅장한 음악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비현실적이고 몽환적 캠퍼스를 영화 내내 휘감던 모리스 자르의 음악은 어떤가. 팀파니와 백파이프가 들리는 음악.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이 책상 위로 올라갈 때, 오름의 순간과 쿵 쿵 하는 음악의 싱크. 그 음악은 ‘Keating's Triumph’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옆 피카소라는 소극장에서 혼자 봤다. 외롭고 고독한 씨네필 학생이었던 나는 피카소에서 몇몇 영화를 더 봤는데 <델마와 루이스>도 그중 하나였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수잔 서랜던과 지나 데이비스가 서로의 결심을 확인하는 순간, 요란한 헬기 소리가 사이로 들어오는 기타의 연주. 한스 짐머의 ‘Thunderbird’다. 그리고 질주하는 두 사람. 파란색 포드 썬더버드 컨버터블이 하늘을 날며 화면 전체가 하얗게 변할 때 난 울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세계 최강 스코어 작곡가 한스 짐머의 OST는 너무 많지만 또 하나 고르라면 <그린카드>의 음악이다. ‘Restless Elephants’가 이 영화의 메인 스코어라 할만하다. 공식적으로 한스 짐머의 음악이 아니지만 분명히 그가 편곡했을 것 같은 ‘Eyes On The Prize’가 실은 더 극적인 음악이긴 하다. 앤디 맥도웰과 제라르 드 빠르디유가 힘껏 포옹하던 마지막 장면에 흐르던. 이때까지만 해도 한스 짐머의 음악은 단순했다. 웅장하지 않았고 짐머레스크라는 말이 나오기 전이었다. 실은 이때 음악을 난 더 좋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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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외국 드라마를 볼 때 아무도 관심 없던 스코어에 난 집착했다. <케빈은 12살>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었고, 이 드라마에는 엄청난 당시 팝송들이 삽입되어 있었다. 특히 오프닝 곡인 조 카커의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가 대표적이었지만, 난 이 드라마에서 케빈과 위니가 사랑에 빠지거나 헤어지거나 질투하고 오해하다가 다시 만나거나 등등 나오던 소박한 기타 선율의 스코어를 더 좋아했다. 십 대의 귀엽고 아련한 감정을 담을 수 있는 것은 당시 내 기준으로 팝송이 아닌 스코어였던 것이다. TV 드라마 하니 또 생각나는 건 영국 드라마 <미스 마플>. 그 드라마의 오프닝 스코어를 또 그렇게 좋아했었다. 플롯과 클라리넷의 목관이 주를 이루는 곡인데 그냥 그렇게 좋았다. 심지어 드라마 본편보다 이 음악이 나오는 오프닝 타이틀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유튜브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을 2000년대 초반, D는 이 음악을 mp3로 찾아 나에게 보내준 적이 있었다.
앨런 실버스트리의 <빽 투 더 퓨쳐> 스코어 ‘Back to the Future’도 빠질 수 없다.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의 노래들도 물론 좋아했지만, 마티 맥플라이가 과연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긴박감은 앨런 실버스트리의 음악이 다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을지로 명보극장에서 연달아 두 번을 관람했던 영화다.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하늘을 날며 홍학 떼를 가르는 장면에 흐르는 존 베리의 풍성한 현과 금관으로 시작하는 음악 ‘Main Title (I Had a Farm in Africa)’는 실로 시네마틱하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 영화만큼 유명해졌었는데, 나에게는 모차르트보다는 존 베리였다. 이쯤 되니 엔니오 모리코네가 빠질 수 없고 자, 그의 엄청난 필모 중 뭘 고른단 말인가. 단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Once Upon a Time in America’이고, 이 음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코어이기도 하다. 정말 아름다운 곡이다. 영화를 보면 더욱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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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어의 아이콘, 존 윌리엄스와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 중 하나씩 더 골라보자. 존 윌리엄스는 <인디아나 존스>의 ‘The Raiders March’. 이만큼 아이코닉한 영화음악 스코어가 또 있을까. 그리 엔니오 모리코네에서는 <언터쳐블스>를 골랐다. 개봉 당시 정말 좋아했던 영화였고, 이 OST의 LP를 사서 이 음악을 수백번 듣기도 했으며, 친한 친구들에게 줄 (인기는 없었던) OST 믹스 테이프를 만들 때 이 음악이 꼭 들어갔다. 엔니오 모리코네 특유의 오케스트레이션 음악이지만 빠르고 박력 넘치는 몇 안 되는 곡이다.
너무 미국인가 싶어서 건너간 곳은 영국. 그러고 보니 케네스 브래너의 영화음악을 주로 작곡했던 패트릭 도일도 좋아했다. <헛소동>이라는 영화가 있었고 영화 초입 등장인물들이 말 달리며 화면에 들어올 때 흐르던 곡 ‘Overture’가 아직 선명하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클래시컬하다. 마지막은 프랑스, 에릭 세라다. 뤽 베송이 그렇게까지 세계적인 스타 감독이 아니었을 때 만든 <그랑 부르>의 에릭 세라는 그야말로 절반 이상의 지분을 갖는다. 레터 덕분에 잊었던 ‘The Big Blue Overture’를 오랜만에 찾아 들었다. 에릭 세라와 뤽 베송의 초기 협업을 즐기고 싶다면 <아틀란티스>를 추천한다. 훌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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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이 15곡의 스코어는 어떤 논리적인 흐름과 이유가 없다. 지금 이 레터의 문장을 다듬는 순간 떠오르는 다른 스코어들도 있지만 추가하지 않기로 한다.
영화음악 스코어에 갑자기 폭주한 이유는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 ‘디깅 사운드트랙’ 덕분이다. 지난 10월 24일(금) 문을 열었고, 자료원에 소장 중인 OST 테이프, CD, LP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모두 청음이 가능하다. 문을 여는 날, 전시실 테이프 공간에 가서 <구니스>를 찾아냈고, 거기서 첫 번째 트랙 신디 로퍼의 ‘The Goonies ‘R’ Good Enough’를 들었다. 멀쩡하게 재생되는 카세트테이프 속 음악이, 그리고 그 음색이 내가 영화음악을 사랑했던 그 시간으로 나를 순식간에 돌려놨다. 내년 1월까지 그곳은 영화음악 애호가들에게 천국과 같은 공간이 될 것이다. 나도 자주 사무실에서 내려갈 거 같다.
내가 주제곡(song)보다 연주곡(score)에 집착했던 이유는, 스코어를 그 영화의 분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를 아주 좋아했던 10대 소년이 극장에서 나와 다시 그 영화를 품에 안을 수 없을 때, 가사 없는 스코어를 들으며 영화와 다시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나이를 먹어 영화와 관련된 공공기관에 취직해 영화와는 별 관계 없는 일을 하며 그런대로 살아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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