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설봉공원에서 설봉산을 바라보는데 유독 노란 은행나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산 전체에 가을빛이 만연한데 그 지점에 커다란 노란불이 하나 들어온 것처럼 선명했다. 저 은행나무를 가까이서 볼 수 있을까. 지금이 더 아름다운 걸까.
거의 즉흥적으로 설봉산을 올랐다. 꼭 은행나무를 향해 간 것은 아니었다. 산에는 설봉산성이 있다고 했으니, 그쪽으로 가볼까, 하며 산을 오르다 도저히 지도대로 갈 수 없어, 그냥 길이 난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이토록 가파른 산길은 처음이었고, 힘들었지만, 그런 만큼 고도는 금세 높아졌다. 정상 바로 밑 영월암이라는 작은 절에 도달했다. 고도 300미터 정도. 이천 시내가 잘 보이는 절이었고, 웬일인지 방문객들로 붐볐다. 그 가파른 길을 잘도 차로 오르고들 있던데 사람이 많은 건 그 덕이겠지. 반갑게도 영월암 입구에, 산 아래에서 커다란 노란불처럼 보였던 바로 그 은행나무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는 중이었다. 주변에 다른 은행나무 고목도 있었는데 유독 그 나무만 노란 잎을 잔뜩 품었다. 신기할 정도로. 은행나무를 올려다봤다. 영월암을 오르내리며 한 바퀴 돌았다. 오래된 석탑이나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마애여래입상도 볼만했다. 조금 다른 위치에서도 은행나무를 한참 바라봤다. 그곳을 떠날 때까지. 만추와 어울리는 고즈넉한 오래된 작은 절이었다.
설봉산에서 내려와 공원을 조금 더 돌고,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롯데프리미엄아울렛으로 향했다. 가게 몇 군데를 돌았는데 내가 살 것은 없었다. 그래도 시간은 잘도 가는 곳이 아웃렛이다. 동지가 한 달 조금 남은 11월의 오후는 너무 쉽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급격하게 피곤이 엄습했다. 오전부터 산에 오른 탓이겠지. 하루를 너무 빨리 끝장내는 겨울 탓도 있을지 모르고. 집까지 한 시간 넘게 운전해야 하는데 차에서 한숨 자고 출발해야겠다 싶었다. 걸음걸음이 무거웠다. 그때. 주차장으로 가던 그때, 이천 특산물 코너가 보였다. 어쩌면 이곳에, 하며 나는 그곳으로 들어섰다.
이천에는 두 개의 맥주 브루어리가 있다. 하나는 ‘을를’ 또 하나는 ‘더홋’이다. 을를은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더홋은 맥주 페스티벌의 부스에서나 볼 수 있었다. 어디라도 여행을 갈라치면 그 동네에 혹은 그 근처에 로컬 맥주 브루어리가 있는가를 반드시 살피는 나는, 이천으로 가기 전 지도에서 더홋 브루어리를 발견하고, 더홋이 이천이었구나 하면서 거기서 맥주를 마실 수는 없어도 사 올 수는 있겠다는 작은 기대에 차 있었는데, 직영 펍의 휴무일이 토요일과 일요일이라는 믿지 못할 운영 정책을 목격하고 좌절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아웃렛 이천 특산물 코너에 로컬 맥주가 있지 않을까? 나의 기대는 응답을 받았다. 있었다. 더홋 4종 맥주가 냉장고에 영롱하게 놓여있었다. 모든 맥주를 하나씩 골라 카트에 담았다. 카트에 맥주를 담고 계산대로 향했다. 덜덜거리는 카트에 담긴 맥주병이 서로 닿으며 짤랑이고 있었다.
덜덜덜덜 짤랑짤랑짤랑짤랑. 덜덜덜덜 짤랑짤랑짤랑짤랑.
믿을 수 없겠지만 그 덜덜거리는 카트 손잡이의 흔들림과 병과 병이 만나는 짤랑이는 소리에 내 피곤이 사라지고 있었다. 은유가 아니고 말 그대로의 신체적 현상이었다. 그 증거로 직후 집까지 운전하는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는 것을 제시하겠다. 그렇게 운전하며 잘 조는 내가, 설봉산을 오르고 내려와 옷을 고르지 못한 채, 검은 패딩을 입은 남자의 공격을 받아 피곤함에 절었던 내가 너무도 멀쩡하고 생생하게 집까지 왔다. 퇴근 후 하나씩 까먹을 맥주가 또 생겼구나, 냉장고에 차곡차곡 집어넣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더홋 브루어리 맥주 4종
어디서부터였을까. 내 피로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은. 이천 특산물 코너 냉장고에서 더홋의 맥주를 잔뜩 발견한 순간부터였을까, 아니면 정말 짤랑이는 병 소리라는 청각적 경험을 하는 순간부터였을까. 무엇이든 너무 알코올중독자 같은 경험 아닌가. 그러나 너무 걱정은 말자. 아무튼 아직 좋아하는 게 남았다는 것이고, 그게 더 귀한 나이가 되었으니까. 간은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만나는 것에는, 혹은 가지고 있는 좋아하는 것을 지키는 것 조차에도 알려진 약이나 처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