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 없이 기타 공공기관에 다니는 N 차장이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보다
* 이 글에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10회까지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제목만 들어도 혼나는 것 같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연봉도 높은 임원 직전의 부장 타이틀을 달았고 거기에 서울에 집도 있다니. 집도 없고 월급도 정부 산하 공공기관 중에서 최하위권이라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기타 공공기관을 다니고 있는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내내 이 나이를 먹도록 뭘 하며 살았나, 그런 자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 김낙수(류승룡)는 소시민인 척하겠지. 그러나 생각을 해보자. 서울에 자가가 있는 대기업 부장님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며 아들도 연대에 보냈다는데, 그만하면 소시민은 이미 벗어났고, 중산층 중에서도 강자 쪽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 사회적 약자인 양 벌벌 떨며 산다고 나오겠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허상의 소시민 아니겠는가. 보는 내내 열등감에 그리고 미디어의 위선에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이 드라마를 전혀 보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쇼츠와 릴스의 알고리즘도 나를 피해 갔다.
회사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료 중 M은 요즘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재미있게 본다는 것이었다. 난 “뼈 때릴 것 같아서 안 본다.”라고 말했고, M은 “뼈 때리는 게 재미있어서 본다.”라고 답했다. 강심장이다. 하긴 M은 서울에 자가가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간간이 듣는 드라마의 몇몇 순간들이 재미있었다. 결국 어느 날 M은 (조금 폭발하듯이) “거 재밌는데 왜 안 봐요?”라며 지금 생각하면 드라마 속 인사 팀장 같은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볼까? 그렇게 이 드라마를 시작했다. 시작부터 김낙수의 나이가 나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쩌나. 이거 더 몰입하게 생겼다.
드라마는 클리셰의 연속이다. 임원 진급을 눈앞에 둔 주인공. 전형적인 꼰대라는 설정. 때에 맞춰 위기감 넘치는 주인공의 큰 실수. 지방 공장으로의 좌천. 명예퇴직. 굴욕적인 퇴직 후의 삶(대리운전 하다 전 팀원들에게 들키는 순간 같은 것), 상가 분양 사기, 형과의 관계...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2회가 남았고, 김낙수가 모든 난관을 헤치고 다시 영광을 찾을 것 같지는 않다. 적당한 선에서, 너무 잔혹하지 않은 선에서 조금 따뜻하게 그렇게 마무리를 지을 것 같다.
이렇게 클리셰 덩어리인 드라마에도 미덕은 있는가. 당연히 있을 수 있다. 클리셰와 좋은 이야기에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고 믿고 있다. 그를 잘 요리하는 방법만 안다면 이야기가 제법 좋을 수 있다.
클리셰와 클리셰 사이, 이 드라마는 확 몰입하게 만드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순간들이 많았다는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그 순간이 무엇이었는지는 쉽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의 합은 알고 있다. 아무튼 50년하고도 좀 더 산 대한민국의 한 남자가, 그것이 실제로 옳은지 맞든지 상관없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악의 없이 행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증거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것들 대부분이 가슴 아프다. 여기까지 기억이 난다. 살라는 대로 살았는데, 그의 삶은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파야 하는 걸까. 무엇이 문제일까. 이런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결국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비교적 서민 중 강자에 속하는 그를 아이콘화 하면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김낙수가 겪는 모든 클리셰들은 클리셰일 뿐이다. 작위적이고 그가 대기업에 다니는 김 부장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를 채우는 모래와 같은 것들. 큰 화분에 돌덩이들을 담고 그사이에 가는 모래를 넣었을 때, 화분은 넘치지 않고 빈틈으로 하염없이 들어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 같은 그 모래들이, 그 모래와 같은 순간들이 이 드라마의 진심이었다. 그래서 10회 중 두 번 정도 눈물이 조금 났지만 어떤 장면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굵은 돌 사이로 사라져 바닥으로 꺼진 모래와 같은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다 있었을 그 모래들이 나에게도 있었다.
M과 회사 관련 톡을 하다 문득 드라마 톡을 보냈다. 다 따라잡았다고. 웃기지만 마음 아프고 공감된다 말했고, M은 그중 “너무 마음 아프지 않아요?”를 선택해 답을 보냈다. 그도 내년엔 50일 것이다. 다 비슷비슷하다. 그러다 M이 톡을 다시 보냈다. “어딘가 외모가 팀장님이랑 닮은 거 같기도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