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한잎’의 키오스크에서 발견한 이히브루의 맥주 ‘여름은’은 베를리너 바이세였다.
8월 말이지만 여전히 더웠던 어느 날. 오랜 대기 끝에 들어간 고수한잎의 키오스크에서 이히브루의 맥주 4종이 보였다. 그중 압도적으로 ‘여름은’이란 맥주가 눈에 먼저 꽂혔다. 얼마나 압도적이었냐면 다른 맥주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베를리너 바이세는 좀 시다는 것이다. 함께 온 J에게 신맛 맥주 괜찮냐고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맥주와 신맛의 조합을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인식한다. 아주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생전 처음 들어봤고, 도무지 도전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난 제2안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J는 좋다고 했다. 신 맥주를 별로 마셔본 것 같지도 않은데 조금 놀랐다. 2안 폐기.
어떤 맥주예요? 바 스툴에 앉은 J는 나에게 물었고, 독일 맥주인데 좀 신 맥주다, 그렇게 난 동어반복을 했다. 그리고 바이세는 독일어로 흰색이라는 뜻이다, 라고 말하자, 흰색이요? J가 급격하게 리액션했다. 당연히 흰색이 맞는데 이렇게 놀란 듯 질문하니 머릿속으로는 아닌가? 그러고 보니 독일어로 흰색은 바이스(weiß) 아닌가? 왜 바이세(weisse)더라, 라는 식의 혼동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바이세면 당연히 독일에서는 밀맥주를 의미한다는 말까지는 연결할 수 있어야 했는데, 거기서 그만 꽉 다 막히고 말았다. 결국 베를리너 바이세는 좀 신 독일 맥주인데 바이세는 흰색이 맞던가? 로 나름 맥주와 관련된 두 개의 책을 낸 작가는 회사 동료 J에게 맥주 지식을 마무리했고, 바로 이 맥주 맛있네요로 대화의 챕터를 별 의미 없는 곳으로 넘겼다.
집에 오는 길에야 생각이 났다. 그래, 베를리너 바이세는 원래 신맛이 강해 과일 시럽을 섞어 마시는 맥주로 유명한데, 라즈베리 시럽과 선갈퀴 열매 시럽을 넣어서 빨갛거나 초록색인 게 일반적이었지! 그리고 도수도 낮아 음료처럼 빨대로 쪽쪽 빨아먹는 맥주로도 유명했었지!! 그렇다 베를리너 바이세는 대체로 2~3%의 저도수 맥주(‘여름은’은 3.5%)다. 더구나 선갈퀴 열매라는 것도 맥주 책에서 베를리너 바이세에 대해 읽으며 처음 접한 식물 이름인데, 어떻게 이렇게 까맣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거드름 피우지 않는 것처럼 위장해서 뭐 좀 아는 선배 역할을 하기가 난 이렇게 힘이 든다.
음식이 나왔다. 오래전에 먹었던 이곳의 쌀국수가 기억에서 소환됐다. 고수가 올라간 돼지국밥이 베이스인데 거기에 밥은 없고 쌀국수를 말아 먹는 느낌. 아주 한국화가 제대로 된 쌀국수였고 난 마음에 들어 했다. 그날도 맛있었다. 벼르고 왔다는 J도 맛있다고 했다.
‘여름은’은 라즈베리 시럽이나 선갈퀴 열매 시럽이 필요는 없는, 완성된 형태의, 이히브루 특유의 음용성 좋은 베를리너 바이세다. 고수가 잔뜩 올라간 돼지 쌀국수와 함께 ‘여름은’을 작은 잔에 조금 따라 마셨다. 청량했다. 그리고 맛있었다. 작명과 같이 여름과 아주 잘 어울리는 맥주였다. 사워 맥주에 낯선 사람에게도 기분 좋을 정도의 약하고 둥근 신맛이었다. 한번 건배를 했고, 작은 잔의 챙 하는 소리와도 ‘여름은’은 잘 어울렸다.
최근 어떤 개발자가 X에 공개해 인기를 끈 게 있는데, 자신의 구글맵 행적을 동영상으로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들이야 과시용으로 공유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집과 회사를 왔다 갔다 하는 와중 아주 가끔 지방 어딘가, 아니면 일본 어딘가로 튀는 정도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J는 주로 밥을 어디서 먹냐는 질문을 했다. 회사 건물을 중심으로 빙 둘러져 있는 누리꿈과 KGIT, MBC몰, 사보이 빌딩(집과 회사)에서 먹는다고 답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회사와 고수한잎은 755m 떨어져 있다(일본 어딘가). 예외적인 거리. J와 식사를 한 것이 몇 년 만이더라. 오랜만의 동료. 베를리너 바이세. 흔하지 않은 맥주. ‘여름은’. 아직은 가까운 여름과의 거리.
곧 여름은 멀어진다. 그를 기념하고자 함은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여름을 보내기 위한,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