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이라는 성적표
나이 들면 건강검진이란 게 일종의 성적표가 된다. 검진받기 며칠 전부터 뭐라도 기대하며 술을 마시지 않지만 그런다고 결과가 깨끗하게 나오지도 않는다. 검진 결과서 1페이지 종합 소견에 언제나 혼나는 내용으로 가득 찬다. 그럼에도 혹시나. 이번에도 난 단기 금주를 하고 검진을 맞이했다.
검진은 문진표로 시작한다. 일단 그간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결과서의 운동 부족과 음주에 대한 소견은 순전히 내가 적은 문진표에 의한 혼냄이라는 걸 왜 진작 몰랐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문진표에 운동도 많이 하고 술도 적당히 먹는다고 적었다. 그래봐야 측정된 수치들이 따로 있으니 그것만 혼나면 될 일, 이거라도 그냥 넘어가면 1페이지에 적힌 내용이 줄어들지 않을까. 문진표를 보면 음주에 대해 평균 음주량을 적고(맥주 한 잔이라고 적었다! 웃기시네...), 지난 1년 중 최대 음주량도 적으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순진하게 ‘소주 3병 + 맥주 1,000cc’를 적었지만, 이번에는 소주 1병만 적어냈다. 이 정도로도 음주량에 대해 지적받으면 난 흑화할 것이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겠지.
문진표를 제출하면 그때부터는 효율로 가득 찬 공간이 날 맞이한다. 곳곳에 배치된 요원에 의해 최적의 순서를 안내받는다. “다음은 22번 혈압 재는 곳으로 가실게요. 어디 어디로 가서 직진하세요.” 요원에게는 대기자 데이터가 보이는 태블릿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종이 문진표만 보면서 놀라운 안내를 해낸다. 그렇게 똑같은 검진복을 입은 사람들은 요원이 시키는 대로 척척 이동하고, 안내받은 번호 앞에서 문진표를 내고 의자에 앉는 행동을 반복하며 잘 설계된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다. 아무 생각과 의지 없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묘한 안락함이 이 과정에 있다. 그러다 순서가 오면, “아무개님, (네!) 번호 확인하실게요.” 그렇게 검진을 받고 다시 안내받은 다른 번호로 이동한다.
지금 내가 대기하는 곳은 3번. 신체측정 구역이다. 내가 전통적으로 혼나는 분야 중 하나는 체중이다. BMI 기준으로 판정받는데 과체중도 아닌 늘 비만 1단계가 나온다. 그나마 비만 2단계 직전까지 갔다가 요 몇 달 사이 운동으로 체중을 아주 조금 내려서 (실질적으로는 대장 내시경을 준비하며) 무난하게 1단계를 쟁취했다. 인바디 결과로도 별다른 반전은 없다. 체지방과 골격근량 모두 표준을 초과하긴 하지만 제발 좀 멈춰! 라는 내적 고함에 아랑곳없이 체지방 그래프가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간다. 그렇게 인바디 기계에서 내 몸의 성분을 측정 당하면서 보니 ‘인바디 기계에서는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데 키가 정확하게 측정되는 건가요?’라는 민원이 많이 있었던 듯 그에 대한 답변이 쓰여있었다. 그것까지 계산한 수치로 키를 산출하니 걱정 마시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그래봐야 몇 mm일 텐데 사람들 민원 참 디테일하다.
효율은 내시경 코너에서 깨진다. 대기실에는 위와 대장 검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하나 가득이고 그들을 쳐내는 속도는 더디다. 사실 난 이 검사를 좋아하는데, 준비 과정이 까다롭긴 하지만 혈관으로 들어오는 프로포폴을 느끼며 훅 잠에 빠져드는 순간이 아주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말짱할 것 같은데 눈알이 뒤집어지듯 갑자기 몰려드는 기운으로 정신이 나가게 되는 그 순간을 2년에 한 번 즐긴다. 이번에도 침상에 모로 누워 “약 들어가요.”라는 요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어, 왜 계속 멀쩡하지, 이상하네, 훅 가는, 눈알이 뒤집어지는 느낌이 어서 빨리 와야 하는데, 약이 안 먹는 거 아냐? 여기 이봐요, 하다가 순식간에 잠에서 깼다. 뭐지 이 억울한 타임슬립은. 2년에 한 번 있는 쾌락이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약의 기운으로 지나치게 이완된 상태에서 혈압을 재고 정상이라는 패스권을 얻었다. 지금은 약으로 혈압을 잡고 있지만 그전에는 혈압만 쟀다 하면 높은 숫자가 나와 혈압계에 팔뚝을 밀어 넣고 호흡을 천천히 하며 몸을 최대로 이완시키고, 눈을 감고 푸른 초원을 떠올리며 나는 안정됐다는 마인드컨트롤을 한다는 걸 혈압 정상자들이 알 리 없겠지. 그리고 몇 가지 검진을 더 한 다음 종료됐다.
검진소는 을지로에 있다. 검진 후 근처에 있는 명동 하동관에서 곰탕을 먹으며 몇 시간 굶고 피까지 뽑힌 것에 대해 보상하는 것이 수년간의 루틴이었다. 그것도 나름의 즐거움인데 이번에는 용종 하나가 커서 다른 병원에 가서 떼어내야 한다며 계속 배를 비운 채 청담동까지 가라고 했다. 프로포폴의 기운을 2년 후로 미루듯, 하동관의 곰탕도 2년 후로 밀렸다. 용종을 떼어내고 2주간 운동 금지, 음주 금지, 흡연 금지 처방을 받았다. 다른 것은 모두 괜찮은데 맥주 한 잔도 할 수 없는 여름밤을 14일이나 보내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글을 쓰며 얼마나 남았나 계산해 보니 이제 4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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