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페인>, 계산된 F
‘보고 싶은 영화’로 오래전에 등록한 영화 중 하나를 꺼내 봤다. 제시 아이젠버그와 키에란 컬킨의 <리얼 페인>(2024). 보고 싶다며 등록한 영화를 왜 수개월이 지난 후에야 겨우, 그것도 힘들게 보는지 그건 나도 알 수가 없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가 있다면 다른 레터로 써야 할 것이다.
<리얼 페인>은 작년 말에서 올해 오스카까지 적수 없는 남우조연상 수상자로 키에란 컬킨이 언급되면서 알게 된 영화다. 딱 거기까지였고 그 외 영화의 다른 정보는 굳이 캐지 않았다. 심지어 이 영화가 끝나는 순간, 엔딩을 보고서야 제시 아이젠버그가 감독과 각본까지 다 했다고? 라는 걸 알았다. 영화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남자 벤지(키에란 컬킨)와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의 폴란드 고향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2차대전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과거를 지닌 집안 이야기 맞다. 두 남자는 영국인 가이드, 그리고 그 투어를 신청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의 역사를 탐방한다. 그게 <리얼 페인>의 거의 모든 줄거리다. 그래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사람들은 ‘성격이 다른 두 남자’와 ‘폴란드 여행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쇼팽의 여러 가지 음악을 배경으로 깔며) 다시 떠올리는’ 정도로 이야기한다. 바르샤바를 비롯한 폴란드 도시 여행은 마치 코고나다의 <콜럼버스>에서 그리는 건축물의 느낌이 있다. 평범하고 오래된 건물을 고요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하지만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르샤바가 아니었다. 벤지와 데이비드라는 두 남자의 관계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이었다.
“이봐, 오빠 이럴 줄 알았다니까? 깔깔.” 대학교 때 공감 능력 문답을 통해 6각형을 그리는 테스트를 하고 있었는데, 내 6각형의 면적이 심각하게 작았다. 거의 1, 2등급에서 선이 그려진 것 같은데, 그걸 보고 후배 Y는 그럴 줄 알았다며 깔깔댔다. 결과도 결과인데, 그럴 줄 알았다는 건 또 뭔가. 남들에게는 내가 이토록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아마도 당시 MBTI 라는 게 있었다면 난 극 T가 나왔을 것이다. 그 후 학교라는 곳에서, 그리고 회사라는 조직에서 사람들과 수십 년을 부딪치며 살 수밖에 없었던 난 지금 F가 나온다. 동료 J는 당신은 F일 수가 없다며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으로 거짓부렁 치지 말라고 하는데, 모르겠다. 항목을 보면 정말 F스러운 항목에 해당하는 게 적지 않다. 결과는 50%를 살짝 넘기는 약한 수준의 F.
나의 F는 학습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이든 본질 T를 버리고 싶은 마음의 발로일 수도 있다. 언젠가 회사 동료였던 H에게 너나 나의 공감 능력은 머리에서 계산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말을 하며 낄낄거리긴 했지만 계산된 F라니, 뭔가 서글프지 않은가.
이건 기본적인 사람의 매력과도 통하는 이야기다. 사람다움과 따뜻함. 그리고 남에게 해를 주지 않을 정도의 거침없는 감정 표현. 이런 걸 디폴트로 장착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그게 디폴트이기 때문에 애를 쓰지 않더라도 매력적인 사람이 된다(보통 사람들은 그런 이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혹은 그가 종종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그건 늘어난 고무줄일 뿐 사람들은 그게 그 사람의 본모습이 아니라고 인식한다. 늘어난 모습이 아무리 오래 보여도 원래 모습은 그게 아니지 않던가 라는 긍정적인 의심을 해주며 그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기어코 인정한다. 나는 정반대다.
머리로 공감을 하는 사람은 따뜻한 사람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차갑다기엔 그간 여기저기 구르면서 닳아버린 모서리가 엉성한 공감 능력을 계산해 내고, 그게 어색하게 머리 혹은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 결국 나에게는 공감하는 능력이 한껏 늘린 고무줄이 된다. 저 사람은 지금 저렇게 보여도 언젠가는 다시 차가워질 거야. 작은 육각형의 사나이. 혹은 가끔 사이코패스로 불리는 사람. 그런 나는 오랜 시간 나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을 대단히 부러워했다. 별다른 애를 쓰지 않아도 사람이 주위에 몰리는 사람과, 애를 써야 사람이 생길까 말까 한 사람의 차이는 매우 크다. 그리고 오랜 시간 상처를 받으며 힘들어했다. 하지만 매우 다행스럽게도 그 시간이 너무 길면 잊는 능력이 생긴다. 그렇게 나 자신을 계산된 F로 만들 수도 있다.
<리얼 페인>의 벤지와 데이비드를 보며 잠시 잊은 그 시간이 올라왔다. 영화 속 '리얼 페인'의 주체는 벤지였겠지만, 난 데이비드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데이비드는 말한다. 그가 아무리 엉망진창이고 이상한 행동과 말을 해도 사람들은 결국 벤지를 좋아하게 되고, 그를 안쓰러워하면서 내내 힘들게 지켜주는 나는 그를 일면 부러워하는 사람뿐이라는 것. 벤지도 힘들겠지만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은 모를 것이다. 알 수가 없지. 데이비드만 아는 것이다. 데이비드가 그래서 투어 관광객들에게 이 사실을 울컥하며 고백하는 순간은 실로 대단한 장면이었다. 또한 영화 초반, 데이비드를 제외한 모든 여행자가 벤지 하자는 대로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던, 데이비드가 아주 자연스럽게 소외되던 장면 또한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놀라운 씬이다. 장담컨대 제시 아이젠버그에게도 이런 경험이 오랜 시간 있었을 것이다. 그걸 각본으로 푼 게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쓸 수가 없는 이야기다. 그러지 않고 쓴 거라면 그는 천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