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된 유일한 맥주 사치품
각자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치 항목이 있지 않을까? 유독 택시를 사랑하는 사람, 안경에는 더 편하게 큰돈을 지출할 수 있는 사람, 다 모르겠고 나의 기분을 위해 기꺼이 1만 원 넘는 조각 케이크를 선택하는 사람 등. 그러니까 당신이 ‘그것’에 쓰는 돈만 아꼈어도 엄청 큰 뭐라도 살 수 있었을 거 아닙니까!, 라는 문장 속의 ‘그것’ 말이다. 나에겐 그게 맥주다.
맥주 한 병 혹은 한 캔은 얼마인가.
편의점에서 4개 10,000원에 묶어 파는 맥주를 표준값으로 본다면 캔 하나에 2,500원. 조금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3,000원까지를 표준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십수 년간 크래프트 맥주에 노출된 나는 맥주 한 병 혹은 한 캔에 10,000원 미만이라면 그리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 쪽이다. 그래, 이미 난 사치스럽다.
한때 이 맥주 정말 비싸서 어떻게 사 먹나, 했던 벨기에 트라피스트 맥주 ‘로슈포르 10’이 요즘엔 9천 원대다. 먹고 싶다면 망설이지 않고 냉장고에서 꺼내 계산대까지 가지고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아메리칸 페일 에일의 원조 ‘시에라 네바다 페일 에일’도 5천 원대면 살 수 있다. 아니, 전 세계에 몇 없는 트라피스트 인증을 받은 맥주 중에서도 최고급 라인에 속하는 맥주를, 40년 이상 건재한 맥주의 ‘종’ 하나를 탄생시킨 역사적인 맥주를 마시는 데 이 정도 지출은 괜찮은 거 아닌가, 라고 내 머리와 몸과 마음과 지갑은 이미 일심동체가 되어있다.
그렇다면 1만 원대가 넘어가는 맥주가 문제인데, 국내외 할 것 없이 아무리 유명한 브루어리의 맥주라 할지라도 그 가격이면 나에게도 ‘그건 비싸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는 BeerAdvocate 같은 맥주 전문 랭킹 사이트에 들어가서 맥주 점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살피며 80점이 넘으면 살짝 망설이고, 90점이 넘으면 능히 사며, 95점 이상 월드 클래스 급이라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치를 부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맥주 가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금방 2만 원, 3만 원, 심지어 5만 원이 넘는 맥주들이 보이고야 마는데 아무리 맥덕인 나라도 거기까지는 갈 수가 없다. 정말 특별한 순간 특별한 맥주를 원할 때, 연례행사처럼 사는 게 아니라면, 즉 2만 원이 넘어가는 맥주는 나에게도 사치품이란 말이다.
그 와중에 정말 예외적으로, 스스로 MOU를 맺은 맥주가 있으니, 그건 토플링 골리앗의 ‘수 Sue’ 시리즈다. 보틀샵에 갔는데 캔 가득 공룡이 울부짖고 있다면, 그게 바로 그 맥주다. 이 시리즈는 종류에 따라, 가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에서 1만 원대 후반에서 2만 원대 초반의 가격으로 팔리고 있다. 비싼 맥주다.
아메리칸 페일 에일 ‘슈도 수 Pseudo Sue’(5.8%)와 한 단계 더 나간 헤이지 더블 IPA ‘킹 수 King Sue’(8.2%)가 대표 상품인데, 내가 생각하는 아메리칸 페일 에일과 뉴잉글랜드 스타일의 정석이자 궁극이다. 그러니까 이 스타일의 맥주를 머리에서 최상급으로 생각했을 때 그것이 곧 슈도 수나 킹 수의 맛이라는 거다. 시트러스 계량의 향을 중심으로 열대 과일의 향이 폭발하는 듯 들어온다. 언제 마셔도 첫 모금의 향이 놀라우며 맥주를 다 비울 때까지도 잘 질리지 않는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이 맥주들은 BeerAdvocate에서도 각각 99점, 100점을 랭크하고 있으며, 국내 팬들도 입점 소식을 기다리며 최대한 생산일이 얼마 안 된 시점에 구매하려 혈안이 되어있는 맥주다.
내가 허용한 유일한 맥주 사치품에 대한 이유를 구구절절 써봤다. 뭐 어떤가, 이 정도 사치스러움이란.
얼마 전 ‘킹 수’보다도 더 독한 ‘사이즈믹 수 Seismic Sue’를 샀다. 트리플 IPA로 도수는 킹 수보다 높은 9.8%. 이 정도면 소맥이 아닌가! 빅 사이즈인 473ml를 마시는데 이건 좀 질리긴 하더라. 나에겐 '킹 수'가 최고인 것 같다. 언젠가 맥주가 많은 보틀숍에 갔는데 공룡을 만난다면 한 번 시도해보시라. 같은 돈으로 7캔 마실 거 1캔 마시며 건강을 지킬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