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계획이 없는 긴 연휴의 한가운데에서
추석 연휴 한가운데 있다. 아무 계획도 없는 긴 연휴를 보내는 중이고, 그러면서 밀린 집 안 청소를 하고 있다. 화장실 대청소를 시작으로 다용도실과 베란다 청소, 바닥 손걸레질, 쌓인 먼지 제거, 밀린 다림질, 쓰레기통 물 세척 이런 것들만 해도 시간은 잘 가고 체력 소진도 잘 된다. 나이만 먹고 거울을 보면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은데 귀신같이 체력은 떨어지고 있다. 이런저런 일들을 해치워도 집에 할 것들은 쌓여있다. 레터를 보내고 오늘은 내 방을 청소할 계획이다. 겨울 토퍼도 꺼내야겠다.
살림은 노동이다. 무기력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히 그렇긴 한데 직관적으로 무기력한 것 같은 연휴, 그러니까 계획 같은 게 전무했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고 그중 하나는 회사 때문이었다. 하루에 적게는 두 개, 많게는 네 개의 회의에 참여하며 혹은 주재하며 밀린 일을 야근 혹은 주말에 출근해서 해치워야 하는 시간이 한 달이 넘어갔고,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댐이 무너지고 거센 물이 몰려드는 것처럼 속절없이 타의로 긴 연휴를 받았다. 계획을 세울 정신조차 없었다. 이런 무계획과 무기력 속에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이거라도 하면 덜 허무하겠다 싶어 꺼내 든 것이 각종 OTT의 찜 목록을 봐버려서 지워버리는 거였다. 실은 집안일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간 해야 할 것들을 미뤘는데 이참에 해버리자는 것.
그렇게 강형철의 <하이 파이브>, 작년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에서 1위를 한 <러브 라이즈 블리딩>, 수개월째 앞 10분만 보고 끊어버린 2시간 40분이 넘어가는 독립영화 <사랑의 고고학>(도대체 왜 영화를 이렇게 길게 만드나), 좋아하진 않는데 그래도 어쩐지 보게 되는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라트비아 애니메이션 <플로우>를 봤다. 이 중 가장 재미있게 봤고 일반 대중에게 추천할 만한 것은 <플로우>. 사람 목소리 하나 없이 장대하고 다이나믹하며 감정적인 서사와 모험을 만들어냈다. 내가 좋아하지만 그러면서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에게는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를 추천할 수 있다. 이상한 중편 영화 세 개가 한 영화 안에 묶여있는데 하나하나가 다 기묘하고 괴상하면서 재미있다. 그리고 내가 제시 플레먼스를 좀 좋아한다. 이 영화의 두 주연 배우(제시 플레먼스, 에마 스톤)가 그대로 <부고니아>에 나온다는데 기대하는 중이다. 아마 이후에 볼 찜 목록 제거 영화 후보는 <추락의 해부> <히트맨> <노스맨> <네브래스카> <콘클라베> <비상선언>... 많기도 하다. OTT 만세.
연휴 내내 날이 궂다. 지금도 창밖은 비가 오다 말다 하는 중이다. 날은 잔뜩 흐리고 바람이 분다. 베란다 난간에 빗방울이 맺혀있다. 감나무와 배롱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축축하고 채도가 낮은 가을이 지나간다. 금방 저 잎들이 떨어지고 서리가 내릴 것이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미하엘 잔데를링이 지휘하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이런 무드를 증폭한다. 계획 없이 집에 침잠해 있으면서 밀린 살림을 해치우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오늘의 청소를 끝낸 후에는 오랜 시간 냉장고에 있던 임페리얼 스타우트 한 병을 꺼낼 차례다.
지금 이 순간. 나보다 더 대책 없이 연휴를 낭비하는 사람이 있었네, 라며 이 레터를 읽는 분들. 당신을 위해 이 레터를 보낸다. 글을 마치는 순간 거짓말처럼 레퀴엠의 가장 유명한 파트, ‘라크리모사’의 마지막 “아멘”이 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