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빛
<부모 바보>라는 독립영화가 있다. 정릉종합사회복지관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재미있을 뻔하다가 잘 모르겠는 영화로 끝이 났다. 영화에는 흐름과 무관한 이질적인 신(scene)이 하나 있는데, 주인공 진현이 독립영화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다. 진현은 독립영화의 다양한 이야기에 매료됐다가 어느 순간 다시는 안 보게 됐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는 이야기가 다 똑같애. 뭐만 하면 취직 안 되는 백수 얘기, 방황하는 청춘, 강가에 가서 분위기 잡고 똥폼이나 잡고 있고....” 내 실눈이 커졌다. 감독들도 다 알고는 있구먼! 이 대사가 영화 중반쯤 나오는데 그다음부터 난 눈을 반짝이며 영화를 봤다. 자아비판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는 영화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그러나 <부모 바보>도 이 무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
한국 독립영화의 무드. 그런 건 정말로 있다. 그리고 그 무드의 한계 속에서 발견되는 좋은 영화도 분명히 있다. ( 다른 곳에서 이란희의 <휴가>와 장우진의 <춘천, 춘천>을 이야기한 바 있다) <부모 바보>에는 공익 요원 영진이 캠코더를 들고 다니며 뭔가를 연신 찍는다. 그리고 그 장면들이 영화 속에 인서트 되어있다. 그와 함께 문득 생각나는 영화는 조민재, 곽진무의 <작은 빛>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몇 안 되는 독립영화 중 하나다.
주인공 진무(배우 곽진무가 연기하는 캐릭터 이름도 진무다)는 선반 만드는 작은 공장에 다니는 36살 남자다. 어느 날 뇌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 나오고, 그 후유증으로 기억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통보를 받는다. 진무는 별다른 동요 없이 받아들인 후, 작은 캠코더를 하나 사서 직장도 그만두고, 가족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모습을 촬영한다. 그리고 그들의 영상을 각자의 폴더에 저장한다. 이게 영화 <작은 빛>의 거의 전부다.
진무의 가족사는 복잡하다. 아버지는 오래전 죽었고, 어머니가 홀로 살고 있고, 누나 하나와 형 둘이 있는데 생부와 생모는 다 제각각이다. 모두 윤택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그냥 평범해 보인다. 퍽퍽한 듯 보여도 이렇다 할 자극적인 사건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들 살아간다. 그걸 이 영화의 감독 조민재는 담담하게 찍고, 영화 속 진무도 자신의 가족을 그렇게 찍는다. 그 무드는 한국 독립영화의 그것임에 틀림이 없는데, 영화 내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진심이란 것이 느껴진다. 그로 인해 작은 장면들이 마음을 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대사들이 신경 쓰인다. 영화 끝까지 그렇다. 요란한 색채에 기름기 흐르는 인스타그램 속 일상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가, 쇼츠와는 전혀 다른 대사와 긴 침묵이 반복되는 이 영화의 리듬이 이상하게 눈과 마음을 러닝타임 내내 붙잡는다. 마치 마술과도 같다. 그리고 그 마술의 일부에는 배우들의 연기도 포함되어 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김현 배우를 제외하고 모조리 모르겠는 배우인데 만들어지지 않은 가족 같다. 적당히 끈끈하고 현실적으로 어색하다. 그 대사와 어투, 눈빛, 태도, 모두가 그렇다.
영화는 아버지의 묘를 파내 이장하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 내내 겨울이었던 배경은 갑자기 여름이 되어있고 수술을 무사히 마친 진무도 기억상실 같은 후유증은 없어 보인다. 복잡한 관계의 가족이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푸른 나무와 덩굴이 우거진 숲을 일렬로 빠져나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저 조용하다. 그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숲에는 새들이 울고 있으며 낮은 음악이 흐른다. 카메라는 롱숏으로 숲 전체를 잡고 진무를 선두로 일렬로 이동하는 가족이 프레임을 모두 빠져나가면, 카메라는 숲만 한동안 잡다가 페이드 아웃 된다. 이 영화다운 맺음이다.
<작은 빛>은 소액 결제를 하면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내가 지금 보라고 떠미는 것은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적극적으로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무드’는 분명히 다른 독립영화와 다르지 않은 이 <작은 빛>의 무엇이 내내 내 마음을 건드렸는지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이, 그저 내 지극히 개인적인 호오에 기인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진무가 엄마를 스쿠터에 태우고 달리는 장면을 카메라와 스쿠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듯 찍은 그 장면도 왜 내 마음을 붙잡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며 그래서 이 영화를 객관적인 근거와 논리적인 이유를 들며 보라는 말을 해줄 수가 없다. 다만, 좋았을 뿐이다. 내가 계속 한국 독립영화를 시도하는 이유는 또다른 <작은 빛>을 찾기 위함일 수도 있다.
어쩌다 이 영화의 오프닝을 봤는데, 검은 배경에 작은 빛들이 스크래치를 내며 춤을 추는 것 같은 장면이 당신의 마음을 붙잡는다면 계속 보길 권한다. 실은 나도 그 장면부터 좋았기 때문에다. 물론 여전히, 그 이유를 당신에게 말해주기는 힘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