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가 말했다. 요즘 영화 재미있는지 잘 모르겠더라. <해피엔드>도 호평 일색인데 난 그냥 그랬다 넌 봤냐, 아니 난 안 봤다 그래서 모르겠다. 그러냐 그럼 <아노라>는 봤냐, 봤다, 어땠냐, 그냥 재미있는 영화였다. 그 마지막 장면 말이야... H를 끊고 내가 말을 이었다. 난 요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칸에서 오스카까지 1년의 수상 레이스를 달리며 그 해를 풍미했던 영화도 가만 보면 그냥 재미있게 만든 영화구나, 거기까지더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느낌, <기생충>도 나에겐 그랬다. 딱 거기까지.
이제부터 시작이다.
난 <슬픔의 트라이앵글>도 그랬다, 그냥 재미는 있는 느낌. (그러자 H는) 트라이앵글이 뭐냐, 왜 뭐가 잘못됐냐, 왜 한국 제목과 원제를 섞냐, 아 <슬픔의 삼각형>이었지.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또 이런저런 영화와 시리즈를 이야기하다 (내가 말하길) <착한 영웅>도 시즌 아니 클래스 1은 괜찮던데, 프라이머리 음악이 특히... (H는) 지금 시즌이랑 클래스가 문제가 아니다 <착한 영웅>이 뭐야..., 아 <약한 영웅>이지. 바로 그때 H가 나에게 <아모레스 페로스>는 봤냐고 물었다. <아모레스 페로스>? 봤지. 봤지만 도대체 언제 적 영화를... 그러자 H가 괴로워했다. 아, 그게 아닌데, 그때 난 H가 어떤 영화를 말하고 싶은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도 그 정답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상대가 비슷한 단어 조합으로 말실수하는 걸 바로 앞에서 들어버리면 누구나 그렇듯 (아니라고?) 나도 거기 말려 정답이 생각 안 난다. 결국 난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아모레스 페로스>는 멕시코 영화야~!” 라고 소리 질렀다. 매운 돼지갈비찜을 사이에 두고 할 수 있는 말이 그거밖에 없었다. 그때는 멕시코 감독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고 (글을 쓰는 오늘은 생각이 난다.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곤살레스다... 그런데 이 글을 퇴고하며 확인차 검색을 해보니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란다. 난 망했다), H가 혼동하는 영화 제목은 결국 생각나지 않았다. 아모...아모... 그냥 생각해 보겠다고 버티다 결국 검색 찬스를 쓴 H는 아, <에밀리아 페레즈>. 맞네. 맞다 <에밀리아 페레즈> 그거 박력 있는 영환데, 재밌는... 그 감독이... 장 자크... 장 줄리... 아닌데. 미치겄네 이름이 뭐더라. 술을 그렇게까지 많이 마신 건 아니었다. 그래 자크 오디아르.
내가 20대였던 첫 직장에서 옆 팀 부서장이 이렇게 말했다. 30대만 돼봐. 예전 같지 않아. 뭐가요? 고유명사. 생각이 잘 안 나. 특히 사람 이름은 기억이 안 나. 정말 생각이 안 나는 거야. 머리는 알겠는데 입은 모르겠다고 해. 지금 생각하면 그 부서장 나이가 서른셋 혹은 서른넷이었을 텐데 참으로 젊은 나이부터 고생이 많았다. 그리고 나에겐 그런 일이 오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럴 리가. 난 대략 40대부터 노안과 함께 고유명사가 생각나지 않음의 삶이 시작됐다. 별일이 없다면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고, 주변에 소음이 조금만 있으면 귀도 잘 안 들려서 뭐라고? (큰 소리로) 이거라고! 를 반복해야 한다. 아직 완전한 어른도 아닌 거 같은데 몸은 어른을 벌써 지나 늙음으로 돌진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