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의 부산행 KTX 출발 시간은 7:58이었다. 부산 출장이었다. 양수역에서 6:18 전철을 타면 여유 있게 서울역에 도착해 커피도 한잔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여유 있게 도착하려면 6:05 차를 타면 됐다. 그러면 서울역에서 45분 정도의 여유가 생긴다. 간단한 아침을 먹을 수도 있다. 그걸 타보자. 모처럼 여유를 부려보자. 알람을 5시에 맞추고 잤다.
이번 출장은 자기 전에 짐을 모두 챙겼다. 없던 일이다. (보통 아침에 후다닥 챙긴다) 길지 않은 출장이니 챙길 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짐은 짐이다. 배낭을 가져다 놓고 배낭 옆에 짐을 늘어놨다. 여기까지만 해도 너무 J 같다. 집어넣는 건 아침에 해도 된다. 어차피 칫솔 같은 건 아침에 챙겨야 하잖아? 잠이 들었다.
한번 잠이 깼다. 새벽 3시 경이었다. 다시 잤다. 기분이 이상했다. 시계를 봤다.
6:19
잠깐. 뭐라고? 뭐. 라. 고...?
내 계획에 있던 6:05, 6:18 전철은 이미 떠났다. 그다음은? 6:29 전철. 그래도 이것만 타면 서울역에 20분 전에는 도착하는데. KTX 015를 타기 위한 마지막 전철인데! 그러나 당연히 불가능하다. 머리에 물을 대충 묻히고, 수건으로 물기만 닦았다. 수건을 던지고 챙긴 옷을 대충 입고, 배낭 주위에 늘어 논 짐들을 마구 쑤셔 넣었다. 아침에 먹는 약? 생략하고 통째로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칫솔과 컬 크림, 스프레이를 후다닥 배낭에 던졌다. 뭐 더 빠진 거 없나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대로 집에서 튀어 나갔다. 양수역까지 차를 몰고 가는 길, 새벽의 신호등 하나를 그냥 무시했다. 그렇게 양수역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6:29 전철이 양수역을 떠나는 게 보였다. 애초에 불가능했다. 떠나는 차를 본 것만 해도 기적이다. 다음은? 6:36. 그건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걸 타면 서울역에 전철이 도착하는 시간은? 7:50. 연착이 없다는 가정하에 그렇게 도착하면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KTX 플랫폼까지 8분 안에 주파해야 한다.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연착이 변수다. 아침 출근 시간의 대한민국 지하철은 연착이 없다. 아악! 그럴 리가 있나!
6:36
전철을 탔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니, 경의·중앙선이 제때 가고 있는가를 체크해야 했다. 난 그때부터 매 역마다 도착 시간을 확인했다. 아뿔싸. 점점 정시와 멀어지고 있었다. 2분. 3분까지. 1544-7769. 경의·중앙선 문자 민원 번호다. 냉난방 때문에 종종 이용하던 이 번호로, 난 처음으로 제발 정시 운행해달라고 애원했다. 기차를 타야 한다며. 매뉴얼 답변이 자동으로 왔다. 그럼 그렇지. 기대도 안 했다. 그런데 혹시 기관사에게 전달은 됐을까? 기관사가 내 절박함을 마음에 담고 있을까? 덕소역에 도착한 시간이 갑자기 2분이나 앞으로 당겨져 있었다. 이럴 수가! 난 부산에 갈 수 있다! 그때 방송이 나왔다. 무궁화호가 오고 있으니 열차가 지나간 후 출발하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두근거렸다. 하필 제일 느린 무궁화호라니. 언제 오려나. 언제 오지? 무궁화 언제 와?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무궁화호가 천천히 덕소역을 지나갔다. 그리고 내가 탄 전철의 문도 닫혔다. 기분 탓일까. 보통 기차를 보낸 시간보다 조금 더 빨리 닫힌 것 같았다. 내 민원을 본 건가? 기관사가 내 민원에 감화 받았나. 난 KTX를 탈 수 있나? 그때부터 전철은 거의 정시에 근접했다. 회기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회기역에 정시보다 딱 1분 늦게 도착했다. 선방이다.
오타 투성이 절박한 민원
미리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에 이마를 갖다 대고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문이 열렸고, 계단으로 두 칸씩 뛰어올랐다. 회기역 갈아타는 곳은 고가로 한 칸만 넘어가면 된다. 지하철 시간표로는 4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그냥 뛰었다. 서울역에서 KTX로 가기 위해서는 승강장의 1-1로 가야 한다. 전철이 금방 도착했다. 이젠 1호선이 연착하지 않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간표와 비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타고 있는 지하철이 이상했다. 시간표를 꺼냈다. 지하철이 이미 연착 중이라 내가 타야 할 차 바로 전(前) 차를 탄 것이었다. 이걸 놓치고 시간표상으로 내가 타야 할 것을 탔다면? 부산 불가능. 그럼 내가 타고 있는 이 차도 점점 연착할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닌가.
카카오 지도앱에서 역마다 정시 도착 시간을 확인한 흔적 중곡역은 왜 있는 거지.
7:30
너무나 서울 대도시의 출근 시간인 것이다. 회기에서 서울역까지 10정거장. 정거장마다 20초씩 늦어진다면? 부산 불가능. 그래도 연착한 직전 지하철을 탄 것이 나의 행운 중 하나였다.
지하철 서울역에서 KTX 승강장으로 넘어가는 데는 비밀 통로가 하나 있다. 대놓고 안내판이 있는 길이지만 직관적으로는 1호선에서 올라와 바로 개찰하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두 개 타고, KTX 대기실로 들어가 거기서 다시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것이 유일한 길. 그러나 비밀 통로는 위로 올라갈 필요 없이 서울역 지하를 구불구불 다니다 보면 바로 KTX 4번 승강장으로 올라가며 나가게 되어있다. 거기서 개찰하면 바로 4번 승강장이다. 보통은 다른 승강장에서 열차를 타야 하는데, 그럼에도 그 경로가 압도적으로 가깝고 빠르다. 그 길만 믿고 있었다. 각 역의 도착 시간은 –1분, 0분, 1분... 으로 서서히 연착 진행 중이었다. 아니 그래도 괜찮다.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다음 역이 종로3가역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코레일 앱에서는 출발 15분 전에 플랫폼 위치를 알려준다.
7:43
앱에 승강장 정보가 떴다.
KTX 015. 4번 승강장.
4번. 쿵쾅거리던 내 심장박동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4번. 비밀 통로로 가면 바로 도착하는 승강장. 행운이 또다시 찾아오다니. 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7:51
1호선 지하철이 서울역에 도착했다. 난 배낭을 앞으로 꽉 안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다 비키라구. 좀 비켜라. 조금씩의 오르락내리락. 그리고 마지막 4번 승강장으로 올라가는 최후의 계단. 내 목은 건조했고 입술은 갈라졌으며 숨은 턱까지 차올라 헛구역질이 나왔다. 계단을 뛰어 오르자 KTX 015, 내가 타야 할 열차가 눈앞에 들어왔다.
7:54
심지어 내가 타려는 9호 칸이 바로 앞이었다. 어이없이 계획보다 79분 늦게 일어난 것치고는 여러 행운이 도왔다. 난 그렇게 부산행 KTX에 몸을 싣는 데 성공했다.
7:58
부산행 열차가 출발했다. KTX가 빛나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한강 철교를 달렸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10:46
부산 도착 후, 바로 미팅 일정이 있었던 난 부산역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컬 크림을 머리에 바르고 스프레이를 촥 뿌리고, 이를 닦았다. 그리고 택시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별일 없이 부산에 막 내려온 사람처럼 첫 미팅을 시작했다.
※ 같은 메트로지만, 지상으로 달리는 구간은 ‘전철’, 지하로 달리는 구간은 ‘지하철’로 표기했다.
※ 5:00 알람은 못 들은 게 아니라 울리지 않은 게 맞았다. 내가 화/목 알람을 수정한 탓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일어난 직후 내가 목격한 숫자 6:19는 아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