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복(bock)
올해 따라 송년 모임이 거의 없다. 그래도 친구 C가 주말에 일산에서 양수리까지 놀러 와 민물매운탕에 술을 진탕 마시고 돌아갔다. 이번 주에는 짧은 여행이 계획되어 있고, 친구 집에 몇 명이 모여 송년 모임도 가질 예정이다. 그게 다다. 어쩌면 회사 사람과 해가 가기 전 한 잔을 할 수도 있겠지.
일도 마무리가 필요하다. 내가 팀장으로 있는 정보자원팀(이 팀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 ‘정보자원’이라는 단어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사업들은 대강 마무리가 됐다. 계량 지표도 목표치를 달성했고, 각 담당자에게 올해 본인 사업에 대한 한 해 보고서를 준비해달라 요청했다. 2025년 사업을 되짚어보니 일은 많았고, 그러나 일은 늘 많았던 것 같고, 그래도 모두 예정대로 종료되고 있었다. ㅇ모 기관에는 자체 사업 평가라는 제도가 있는데, 우리 부서가 속한 사업이 1등을 해 ‘우수’ 등급을 받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작년에도 1등이었으니 2년 연속이다. 그 데이터는 부서 KPI에 들어가는데 그래봐야 2위 혹은 꼴등을 한 팀보다 100점 만점 1점이 높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평가라는 것이 허탈하긴 하지만, 기분은 기분이니까. 우리 부서가 수고했고, 그 사업들을 잘 해냈다고 인정을 받은, 정성적인 평가로도 가치는 있는 것이다.
이번 주에는 부서원들과 내년 사업에 대해 간단하게 면담하며 2026년 사업을 정리할 예정이다. 아주 질색하겠지. 부서장과 업무 면담이라니. 소소한 반전이라면 나도 하기 싫다. 그렇게 내년 사업을 챙기고, 올해 잔여 예산을 털고, 그러면서 2027년 (2026년의 오타가 아니다) 예산도 고민하며, 10명 남짓 되는 부서원들을 관리한다. 인적 자원을 관리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일은 잘 분배되고 있는지 그들의 역할은 명확한지 살피는 것 모두가 부서장으로서 책임져야 할 일이다. 하물며 누군가의 체중이 준다는 소문을 듣는 것도 신경 쓰인다. 그것들을 내가 잘하느냐. 그건 알지 못한다. 나에 대한 조직의 평가는 늘 들쭉날쭉했고 그건 누구나 인정할 만큼 늘 내가 잘하지는 않는다는 방증이다. 그렇게 이 팀의 장을 5년간 수행했고 일단은 내년에도 유지될 예정이다. 매년 말 뒤숭숭한 인사도 이제 모두 마무리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그 폭풍에서 제외됐다.
모든 것은 정리되고 있다. 그러면서 다들 내년을 준비 중이다. 박물관을 위해 편성된 155억의 예산도 지금은 소란스럽지만, 어찌 됐든 집행하게 될 것이다. 기관장도 바뀔 것이고, 지금 사무국장은 그 자리를 뜨기 전까지 “유 팀장은 맨날 회사에 없어”라는 말을 반복하겠지. 그럼 난 허허 웃으며 “국장님 저 지금 여기 있잖아요”라는 실없는 말을 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연말을 마무리하며 혼자서 술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 척박한 상암 DMC 지구에는 펍이라 할만한 곳이 전혀 없다. 홍대까지 나가면 선택지는 많아지지만 대부분 시끄럽겠지. 젊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펍도 좋지만, ‘혼자’ 가도 좋을 ‘마무리’라는 키워드와 함께할 펍은 어디가 좋을까.
‘ 누바’가 적당할 것 같다. 수많은 가게가 열리고 닫히는 그곳에서 십오 년 가까이 버티는 저력 있는 펍이다. 벨기에 맥주 전문으로 시작했는데, 근처에서 자리를 한번 옮긴 후 꼭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어둡고, 차분하며, 조용하다. 그리고 화이트 라구 라자냐 같은 음식도 괜찮다. 날 좋을 때 2층에서 창을 열고 마시면 상당히 낭만적인데 지금은 그러지 못하겠지.
온 탭 맥주를 확인해 보니 미국 에네그렌 브루어리의 ‘크리스마스 복’이 들어와 있다. 다소 생경할 수 있는 맥주 ‘복’은 고도수 라거(6.3%~7.5%)다. 홉이나 효모의 향보다는 맥아 특유의 단맛이 깊게 들어오는 맥주로 몸 전체를 따뜻하게 해준다. 그래서 겨울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맥주다. 임페리얼 스타우트나 더블 IPA 같은 것의 도수가 더 높지만, 캐러멜의 단맛과 함께 녹진하게 들어오는 알코올이 더 겨울과 어울린다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 참고로 마트를 돌다 염소 그림이 그려진 맥주를 발견한다면 ‘복’ 맥주일 가능성이 99%다. ‘복’은 독일 아인벡(Einbeck)이 발상지인데 사람과 사람을 타고 전해지다 바이에른 지방 사투리가 섞이며 아인벡 (지역의 맥주 주세요) → 아인푀크 → 아인 복(Ein Bock, 염소 한 마리)이라 발음되며 ‘복 Bock’ 맥주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염소가 맥주의 상징이 되어있다.
올해가 가기 전 퇴근길. 시끄럽고 걷기 번잡한 홍대 ‘걷고 싶은 길’을 지나 누바에 들어갈 수 있길 바란다. 사람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구석 자리를 잡고 안주 없이 크리스마스 복을 주문한다. 달고 독한 맥주가 몸에 퍼진다. 딱 한 잔 마시고 손님이 몰려오기 전에 그곳을 나서야겠다. 복을 마셨으니 날이 좀 추워도 상관없을 것이다. 홍대입구역까지 걸어가는 동안은 찬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길로 히터의 열기가 올라오는 지하철 의자에 몸을 묻고 한숨 자며 귀가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