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인 할리우드 영화고, 할리우드 장인들의 작품이다. 대사는 유머로 가득하고 지금까지 인용되는 몇몇 장면이 있다. 베리 소넨필드가 촬영한 가을은 아름답거나 때로는 황량하며, 하워드 쇼어의 스코어는 문득 데이브 그루신을 닯았지만 엔딩 음악 ‘굿 바이’는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 음악 중 하나였다. 여드름이 덕지덕지 난 십 대 꼬맹이가 재미있게 봤던 이 영화는 놀랍게도 2025년 현재에도 유효했다. 이게 헷갈리는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에 지금도 재미있게 느낀 것인가. 그래서 이 영화는 사실은 어린이 영화였을 뿐인데 그 기억 때문에 나만 좋다는 건가. 하지만 <빅>은 개봉 당시에도 상당한 히트작이었다. 어른들이 많이 봤다는 말이다. 그럼 왜 요즘은 이런 영화가 없냐는 꼰대의 머리가 돌아가고, 이 영화와 지금 영화의 다른 점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얼마 전 피터 위어의 <죽은 시인의 사회>(1989)를 봤다. 놀랍도록 비슷한 수위로 재미있었다. 그리고 단순했다. 단순하다라... 무엇이 단순한 걸까. 그냥 직선이었다. 직선? 그러고 보니 이 영화들에는 플래시백이 없다.
가장 최근에 본 영상물이 뭐가 있더라. 넷플릭스 시리즈 <자백의 대가>(2025) (어느덧 감독 이름 자리에 플랫폼 이름이, ‘영화’ 대신 ‘영상물’이라는 명사가 대신하고 있다) 만 해도 플래시백투성이다. 당신 말이 맞다. 추리극은 고전영화에서도 플래시백이 필수이긴 하다. 포와로나 홈스가 용의자를 한곳에 모아놓고 범인은 바로... 하는 시퀀스에서 그들의 과거와 행적을 다시 보여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르와 관계없이 요즘의 거의 모든 영화나 시리즈에는 플래시백이 필수인 것 같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당시 그런 일이 있었고, 그것이 현재 어떤 일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퍼즐을 맞추는 쾌감을 내(영상)가 줄 테니 그걸 잔말 말고 받으라는 명령을 나는 영상 콘텐츠로부터 받고 있다. 건방진 영상 콘텐츠 같으니라고. 언젠가 정성일이 임권택의 <서편제>(1993)를 이야기하며 플래시백의 구조가 기이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플래시백이 그리 흔한 장치는 아니었던 걸까.
물론 이야기를 진행하며 과거를 소환하는 것은 금기할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이것이 나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도 당연시된 지금 플래시백이 없는 영화가 신기하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 신기함은 단순한 직선이며 할 말만 박력 있게 하고 2시간 안쪽으로 러닝 타임을 끝내버리는 미덕과 연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꽤 좋은 선택지 아닌가? 자신이 생각한 끝내주는 설정을 이야기로 뽑을 때 이리저리 스타일을 과시하지 않고 ‘좋은’ 이야기를 선명하게 말하는 방법이지 않냐는 말이다. 그러나 나 개인의 ‘끝내주는 설정’을 구상하는 것보다 그것을 ‘좋은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것이 100배쯤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 100배의 어려움을 성취한 영상물이 정말로 예전보다 줄어들었을 수도 있다. 명작 속의 플래시백 없는 직진은 이 성취의 작은 증거가 된다.
2025년 12월 31일이다. 영화 말고도 플래시백 없는 직진을 생각해 볼만한 날이다. 2025년. 반짝거리는 순간 따위는 전혀 없이 조금 멍청했거나 혹은 조금은 기뻤던 순간들이 오실로스코프의 곡선처럼 위아래로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다. 30번째, 올해의 마지막 레터를 거의 다 쓰며 1980년에 출시한 고전 맥주 시에라 네바다 페일에일을 마시는 지금은 조금 기뻤던 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곡선은 결국 좌측을 향해 흘러 사라진다. 그리고 우측에서 새로운 곡선이 출현한다. 플래시백 없는 직진. 그것도 박력 있는 직진으로, 그렇게 새해를 맞이하길, 나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이 레터를 읽는 몇몇 에게도 그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레터를 보내기 위해 조금 늦었다는 핑계를 믿어주길 바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