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말, 난 어떤 영화를 봤더라. 김병기 감독의 <전지적 독자 시점>(2025). 그리고 짧은 호흡의 이야기들이 미친 듯 난무하는 영화의 절망 편을 경험했다.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 <조각 도시>(2025)도 보는 내내 이것이 영상 콘텐츠의 미래가 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끔찍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의 자극 연속체였다. 공교롭게도 다시 김병기 감독의 <대홍수>(2025) 관람.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 SF지만 아무런 재미가 없었다. 감독이 뭘 의도하든 말든 상업영화라면 재미가 있어야겠지. 넷플릭스 시리즈 <자백의 대가>(2025)를 봤다. 지난 레터에서도 말했듯 작가가 재밌겠는데? 라고 떠올린 설정을 제대로 이야기로 풀지 못한 경우다. 그렇게 2026년을 맞이했다. 이런 상황이 이제 익숙해졌다. 기대가 사라지고 있었다.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 포스터
2026년 첫 영화는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 Wake Up Dead Man: A Knives Out Mystery>(2025)이었다. 소문대로 재미있었다. 존 딕슨 카의 추리 강의를 노골적으로 발설하며 밀실 트릭으로 시작된 초기 설정을 틀고 또 튼다. 복잡다단한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진상이 너무나 궁금한데, 영화의 마지막 탐정의 설명에 관객 대부분 수긍하고, 이야기에서 오는 순수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야말로 2025년 현대 장인의 작품이다. 난 이 영화에서 신부(조쉬 오코너)가 중장비 업체 사람과 끝도 없이 통화하는 장면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매 순간 도파민에 절인 장면의 연속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시퀀스다.
<내 말 좀 들어줘> 포스터
그러다 마이크 리(이 양반이 1943년 생이라니)의 <내 말 좀 들어줘 Hard Truths>(2024)를 봤다. 중년 여인 팬지(마리에나 장바티스트)는 온 세상에 대한 화가 가득하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팬지의 수위 넘는 분노의 말에 두들겨 맞아야 한다. 이유를 모른다. 무표정하게 견딜 뿐이다. 영화는 계속 그렇게 흐른다. 별다른 이야기 없이 험한 말을 쏟아내는 팬지의 일상인데, 이 영화가 어디로 가려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된다. 요즘 유행하는 ‘K-스토리’라면, 막말하는 그녀를 통쾌하게 참교육하는 아들과 아버지, 그들의 활약은? 이라는 태그라인에 걸맞은 한심한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겠다. 물론 마이크 리가 그럴 리는 없다. 여동생 산텔(미셀 오스틴)과 어머니의 기일에 무덤을 찾은 팬지는 그곳에서도 험한 말을 쏟아낸다. 무력한 남편과 아들과 달리 산텔이 드디어 언니에게 받아치는 건가? 그렇지가 않았다. 그 후로 팬지의 다른 모습이 보인다. 갑자기 영화는 팬지를 여러 방향에서 보여준다. 더 깊게 다가갔다가 빠져나오기도 한다. 미스터리한 단편적 캐릭터였던 팬지가 다채로운 조명을 받는 입체적 피사체가 되고 있었다. 때로는 아름다운 피사체가 되기도 한다. 그와 함께 영화도 변한다. 그게 끝까지 간다. 이 영화적 경험이 매우 놀랍고 강력했다. 마리엔 장바티스트의 연기에 경탄했다.
<대통령의 케이크> 포스터
하산 하디의 2025년 이라크 영화 <대통령의 케이크 مملكة القصب>를 봤다. 1990년대 이라크,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이었던 시절이다. 실제로 당시 사담 후세인의 생일에 학교와 관공서를 중심으로 케이크나 과일 같은 것들을 조공했다고 한다. 영화의 주인공 라미아(바닌 아흐마드 나예프)는 9살 여학생이다. 그리고 그 학급의 케이크 조공자로 추첨 된다. 라미아는 걱정이 많다. 엄마 아빠도 없이 할머니와 어렵게 사는데 어떻게 케이크를 만드나. 할머니는 라미아에게 케이크의 재료가 달걀, 밀가루, 설탕, 베이킹파우더라고 알려준다. 그 재료를 찾는 과정, 라미아에게는 믿을 수 없는 끔찍한 모험이 된다. 윤가은의 <콩나물>(2013)이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에서의 모험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환상이 될 뿐이다. 라미아 옆에는 도와주려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 흉포하고 잔인하며 끔찍한 사람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그 모두를 감싸는 시대가 가장 폭력적이다. 그 아수라장에서 라미아는 케이크의 모든 재료를 구하긴 한다. 이웃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케이크를 만들어 학교에 가져간다. 선생이 케이크를 먹어보고 맛있다고 하는 찰나, 그 학교는 폭격을 당한다. 먼지 속에서 라미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게 영화의 끝이다. 이토록 현실적이며 끔찍한 아이의 모험이 있었던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멍했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나의 무엇을 움직여야 난 그 영화를 잘 봤다고 받아들인다. 딱 그 정도다. 마음을 움직이든 머리를 움직이든,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는 텅 빈 나의 이성을 지나 내 마음을 건드리게 된다. 2026년이 시작되자마자 몇몇 영화들이 나를 건드렸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솔직히 조금 안심했다. 영화는 여전히 혹은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