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플리스를 입은 아이
퇴근 후 회사에서 수색역까지 걷는 15분의 길. 겨울이 주는 대표적 시련이다. 이번 겨울 최장 한파 주간이라는 1월의 넷째 주 한 가운데(그달의 1일이 목요일이면 그 주가 첫째 주가 된다. 그달의 1일이 금요일 이후라면, 그 주는 전 달의 마지막 주가 된다. 2026년 1월 1일은 목요일이다. 따라서 1월 19일로 시작하는 주는 1월의 넷째 주가 된다),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턱을 집어넣어 코를 패딩 꼭대기에 올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MBC 앞 횡단보도를 건너 토끼굴 지하도를 지난 다음, 수색역 광장을 가로질러 2층 대기실로 올랐다. 경의·중앙선 용문행 전철은 10분 뒤에 온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플랫폼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래도 덜 추운 대기실에서 안내 전광판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지루하고 그곳도 추웠다.
삑! 그때 누군가 카드를 찍고 개찰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세 명이었는데 뒷모습이었지만 가운데가 엄마고 양쪽이 십 대 아들과 딸인 것 같았다. 이 날씨에 벌써 나가다니. 게다가 아이들의 옷이 가벼워 보였다. 그중 남자아이는 흰색 플리스를 입고 있었는데, 대기실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포함한 어른들이 옷장에서 꺼낸 가장 두툼한 시커먼 옷과 비교됐다. 개찰구를 통과한 흰색 플리스의 그 십 대 아이는 조금 걷더니 갑자기 왼팔을 들어 춤을 췄다. 그러면서 엄마 옆, 다른 쪽 끝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보며 웃었던 것 같다. 그 일행은 그대로 경쾌하게 걷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영하 십몇 도의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그들은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빈 공간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웃고 있었다. 길을 걷다 개와 마주칠 때 마음이 웃는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식당에서 맞은 편에 앉은 못생겼지만 귀여운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내 마음이 웃는 그런 거 있지 않은가. 그런 웃음은 대기실의 공기를 아주 조금 달라지게 했다. 따뜻해질 리는 없지만 조금 밝아졌달까. 정말이다. 흰색 플리스의 아이가 춤을 추던 순간, 내 이어폰에서는 시카고에서 활동하는 듀오 DRAMA의 ‘Here With Me’가 흐르고 있었다. 그 음악도 분위기에 일조한 것 같다. 운전하다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데 차에서 나오는 음악과 내 앞 차의 좌측 깜빡이 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때 느껴지는 쾌감 같은 거 있지 않은가. 짜이지 않은 일상의 풍경에서 시각과 청각이 기대하지 않은 조화를 이루는 순간의 즐거움. 비슷한 거였다.
시계를 봤다. 용문행 전철은 아직 6분 남았다. 머뭇거리던 나는 개찰구를 통과해 보기로 했다. 삑, 카드를 찍고 걸어 나갔다. 그 아이처럼 춤을 추지는 않았지만, 살짝 밝아졌다고 생각한 혹은 공기가 달라졌다고 생각한 그 공간을 지나쳐 흰색 플리스 아이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내려갔다. 플랫폼은 역시 추웠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미 내려와 있었다. 5분 정도 기다리니 전철이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전철 안은 따뜻했다. 빈자리에 앉았다. 장딴지에 히터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문이 닫히고 전철은 어두운 겨울을 달리기 시작했다.
흰색 플리스를 입은 아이가 왼팔로 잠시 공기를 흔들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아직 겨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