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두아
다수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시스템은 약하지 않다. 약할 수가 없다. 그게 너무 강해서 현실에서는 문제가 될 정도다. 그런데 한 개인이 그 시스템을 뭉개버리는 픽션이 가끔 있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그걸 권력에 맞서는 개인에 대한 쾌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의외로) 난 그렇지 못하다. 부패한 시스템에 통쾌한 일침을 날리는 천재 개인 혹은 잘 조직된 팀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요즘은 부패한 시스템을 그리는 그런 이야기도 거의 없지 않나. 다 낡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 그래서 어중간한 선악의 포지션 간 대립이 나오는 픽션에서 난 늘 (특별히 악하지도 않고 묵묵하게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시스템을 응원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시스템이 개인에게 쥐락펴락 당하는 이야기가 계속되면 짜증이 슬슬 나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애초 염두에 둔 반대쪽을 난 응원하고 있는 셈이다. 왜 그렇게까지, 이 나이 먹고도 픽션에 몰입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좀 그렇다. 최근 본 넷플릭스 시리즈, <레이디 두아>가 그런 경우였다.
서울 강남 하수구에 한 여자가 얼굴이 으깨진 채 죽어있는 게 발견되는 걸로 시리즈는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체를 사라 킴(신혜선)으로 추정하며 경찰은 그녀의 행적을 조사하게 된다. 그러면서 ‘무적자’였던 여자가 어떻게 명품 브랜드를 만들었고, 재벌을 상대로 사기 쳤으며, 경찰 시스템을 물먹이는지 퍼즐 조각 하나하나 따로따로 공개하듯 연출한다. 처음에는 그게 재미있었다가, 딱 시리즈 중반에 왔을 때, 사라 킴이 변호사도 대동하지 않고 자신이 무적자라는 것 하나로 경찰 시스템에 맞짱 뜨고, 베테랑 형사를 조롱할 때, 또 그게 통하는 걸 볼 때, 결국 리모콘을 들고 빨리 돌리기를 시작했다. ‘아, 도저히 못 봐주겠다.’ (뭔가 스포일러가 나온 것 같긴 한데, 미스터리물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처음 등장하는 시체가 사라 킴일 수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니 아량을 베풀어달라.)
극 중 재벌(배종옥)은 사라 킴에게 ‘난년’이라고 표현한다. 맞지, 충분히 ‘난년’이긴 한데, 사라 킴이 한 것은 단순히 ‘났다는’ 이유만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빈센트 앤 코’라는 실제 사건이 있긴 했지만, <레이디 두아>의 수준은 아니다. 시리즈 전체가 허상을 좇는 현대 인간들에 대한 ‘우화’라고 납득해도 그 길고 긴 경찰서 플롯은 그 납득의 범주에서도 벗어난다. 내가 전문가로 이루어진 자기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집단에 대한 호감이 지나치게 높은 탓일 수도 있지만. <모범택시> 같은 시리즈만 봐도 장애인을 부리며 젓갈을 만들어내는 영세한 공장을 물먹이는데도 내로라하는 팀이 최선을 다해 움직이지 않던가. 그쯤 돼야 서로 맞다이를 놓으며 최종 승리할 수 있다는 당위가 가능해진다.
그러고 보면, 난 왜 이렇게 한낱 픽션에 몰입할 정도로 시스템 편을 들고 있는가. 우선 나이가 들고 그에 따라 자동으로 보수화되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건 기본으로 깔고, 두 번째 이유. 평범한 사람들의 시간을 신뢰하고 싶다는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나이 혹은 시간과 관련 있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은밀함과 동시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겠지. 우리는 대게 난년이나 난놈이 될 수 없이 시스템 안에서 시스템의 일부로 살아가게 된다. 젊었을 때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난 무엇’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지만 하나 둘 셋 넷 시간이 쌓이면서 그 착각은 착각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순간 나의 다섯 여섯 일곱 여덟의 시간이 다시 지나갔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보상받고 싶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 시스템 안의 시스템 안의 개인이 얼마나 나름의 최선을 다해 살아오는지를 이제는 알게 된 것도 있다. 그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에게 쌓인 시간, 그리고 그들이 뭉쳐져 만들어 낸 시스템, 이런 것들을 우습게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참 늙은 생각이지만 어떡하나, 내가 늙은 것을. 그래서 <레이디 두아>를 스킵해가며 본 것을. 내 시간에 대한 핑계인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