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초능력 2
이 정도면 하찮지만 나의 초능력이라고 인정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은 올해 1월, ㅇ모 기관 신년 부서별 사업계획을 발표할 때였다. 난 준비한 발표 자료를 10분에서 길어져 봐야 15분짜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부서당 20분으로 배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더 할 말도 없는데, 일찍 끝나면 다 좋지 않겠나, 라는 생각에 주최한 M 팀장에게 금방 끝내겠다고 하고, 당일 난 타이머를 동작시키고 발표했다. 발표 중, 다급해 보이는 M에게 의외로 1분 남았다는 신호가 왔을 때 난 마지막 장표를 이야기하는 중이었고, 이상으로 마치겠다고 말하고 내 폰의 타이머를 보니 19분 52초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 나의 하찮은 초능력은 ‘얼추 발표 시간을 맞춰 버릴 수 있는 능력’이 되겠다.
처음에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기가 막힌 우연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표할 때 타이머를 동작시키지만 발표하는 내내 그걸 면밀하게 보지는 않는다. 한두 번 흘끗 보기는 하나. 그걸 봤다고 그 후의 발표 분량을 조율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럴 여유가 없다. 그냥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볼 뿐이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발표를 계속한다.
3년 전 어떤 발표의 제한 시간은 10분이었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스톱워치가 아닌 알람을 설정하고 발표를 시작했고,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라는 말을 함과 동시에 알람이 울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더 오래전 부산에서 꽤 큰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는 30분짜리 발표를 해야 하는 자리였다. 중간에 사무국장이 무대 옆으로 뛰어나오더니 팔을 빙빙 돌렸다. 내가 예시로 들고 있는 대목이 너무 늘어지니 좀 빨리 진행하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스킵하고 진행했는데, 역시 29분대에 끝났다. 사무국장의 돌아가는 팔이 없었다면 30분을 초과했을까? 요즘은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2년 전, 45분으로 요구받은 북토크도 정확하게 끝내서 주최자가 엄지손가락을 올려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연습하는가. 한 적이 있다. 첫 번째 연습 결과 할당 시간보다 더 늘어졌다. 그래서 어느 대목을 줄이고 말의 속도를 얼마나 빨리 해야 하는지를 신경 쓰며, 그렇게 제한 시간 맞추는 연습을 계속했다. 성공하기까지 5번 정도 반복해야 했다. 힘들고 피곤하더라. 물론 그 발표도 시간 내에 무사히 마치긴 했는데, 그 후로는 더 이상 연습하지 않았다. 왜냐고? 힘들고 피곤하니까. 그래서 연습은 단 한 번이다. 그러나 연습 없이도 어지간하면 나의 하찮은 초능력은 늘 통하는 편이다.
나의 책 『여름 맥주 영화』에는 ‘하찮은 초능력’이라는 글이 있다. 음식에서 카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글에서도 시간에 맞춰 발표를 마치는 능력에 관해 잠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데이터가 더 쌓여야 한다고 말해놨다. 이제는 그 데이터가 충분히 쌓인 건지도 모르겠다.
아, 하나 취약점이 있다. 5분 이하의 발표다. 그렇게 짧아야만 하는 발표가 잘 없긴 한데, 언젠가 5분으로 약속한 발표를 그보다 늘어지게 끝낸 적이 있다. 원통하다. 내일 난 3분짜리 발표를 해야 한다. 모든 음식에서 카레 냄새 맡아내기 능력에 이은, ‘얼추 발표 시간을 맞춰 버릴 수 있는 능력’이 하찮은 초능력으로 격상될 수 있을지에 대한 마지막 관문이 될 것이다.
※ 하필이면 영화 리뷰도 아니고 털끝만큼의 지식 전달도 아닌 막 나가는 내 개인적(이며 그간 레터를 꾸준히 보던 분들에게나 조금 재미있을) 글을 써놓고 발송하려 보니 구독자 수가 거의 3배로 뛰어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다음엔 영화 이야기도 좀 하고 술 이야기도 하고 그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