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서 발표를 잘하는 방법
제안서 기술평가를 다녀왔다. 공공기관이 용역 사업을 하기 위해 입찰을 내고, 입찰에 참여한 제안사들이 15분에서 20분 사이의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자리다. 난 거기서 평가를 한다. 그 자리를 ‘제안서 기술평가’라고 한다. 나의 직책과 늙음으로 지금까지 100번 조금 안 되는 정도의 그런 자리에 참여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프리젠테이션이 유리하며 1등을 하는가, 라는 것이 어느 정도 머리에 들어와 있다. 물론 매우 주관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결과를 보면 다른 평가위원의 생각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1. 의상
발표하는 PM의 옷은 당연하게도 단정한 정장이면 좋다. 각 잡은 고급 맞춤 정장일 필요는 없다. 남자라면 몸에 잘 맞는 재킷에 정장 바지, 그리고 셔츠에 타이 정도면 된다. 재킷과 바지가 한 쌍이 아니어도 된다. 단추를 풀어도 상관없다. 깨끗하고 단정하기만 하면 된다.
다만 몸에 맞지 않거나 연식이 너무 오래된 정장은 피했으면 한다. 의상은 그 자리의 비주얼이 아니다. 상대에게 신뢰를 주는 장비에 더 가깝다. 몸에 맞지 않는, 혹은 지나치게 오래된 정장은 그 PM이 이런 자리에 매우 오랜만에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관록과 경험에 대한 신뢰가 깨진다.
2. 외모
아무 상관이 없다.
3. 목소리
의외로 별 상관이 없다.
4. 프리젠테이션의 디자인
프리젠테이션의 디자인도 신뢰 차원에서 중요하다. 아름답고 예쁜 발표 자료를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일관된 톤의 깔끔한 디자인이면 된다. 개인적으로 거슬리는 것은 깨진 폰트, 종횡비를 막무가내로 맞춰 일그러진 이미지, 디폴트 굵기의 라인이 보이는 표, 정장 입은 사람이 웃으며 손짓하거나 화이팅하는 스톡 이미지, AI로 생성한 냄새를 심하게 풍기는 페이지 기타 등등 기타 등등. 하지만 이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공공기관 사업을 위한 제안서에는 기본 무드라는 게 있다. 제안요청서에 있는 항목들을 모두 수행하겠다고 써야하기 때문에 내용은 많고 컬러도 비슷비슷하고 탬플릿도 비슷비슷하다. 다 괜찮다. 트렌디하고 현란한 발표 자료라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며 그런 게 필요하지도 않다.
다만, 유치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단정한 구성이란 게 있다. 그에 잘 맞는 폰트라는 것도 있다. 어울리고 조화로운 컬러 배합이라는 것이 있다. 이런 것만 지켜주면 된다. 간혹 너무 아마추어가 만들어 온 것 같은 발표자료가 있는데 아무리 내용이 훌륭해도 이건 기본의 문제다. 기본이 안되어 있다는 것 역시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5. 프리젠테이션의 내용
제안서 요약본(발표 자료)은 평가위원이 평가장에 오기 전까지 공개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와서 잠시 훑어보는데 시간 관계상 모든 페이지를 정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냥 쓱 볼 수밖에 없다. 아니면 자신이 전문이라고 생각하는, 이것만큼만 체크해 봐야겠다는 그 하나만 꼼꼼하게 보게 된다. 그리고 많은 평가자는 제안사의 프리젠테이션 때 좀 더 자세히 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여러 가지 문서(보안 각서, 돈 준다는 참여 확인서, 제척 확인서 등)에 사인을 한다. 그렇게 15~20분의 제안사 발표를 기다린다. 그 시간에 많은 것이 좌우된다.
제안서의 많은 항목들은 거의 필수 영역에 가깝다. 성능, 데이터, 테스트, 보안, 품질, 제약사항, 프로젝트관리, 프로젝트지원… 거의 동일하다. 구색에 맞춰 이런 걸 쓰긴 해야 한다. 하지만 평가자로서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아래를 보자.
이 사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사업 자체의 이해를 하지 못한 채 들어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걸 어떻게 진행할 예정인데,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투입될 예정이며(따지기 쉬운 매우 정량적 내용), 비슷한 사업의 경험은 이러하고(의상과 디자인을 압도하는 가장 중요한 신뢰 영역) 제안요청서에서 강조하는 핵심 세부 과업은 무엇인데(사업의 이해 영역 심화 코스), 그걸 무사히 끝내기 위해 이러한 전략을 가지고 있으며, 제시된 기능들을 어떻게 잘 구현할 것인지(실제 사업의 이야기), 그리고 일정을 넘기지 않을 자신이 있으며(마감은 늘 중요하다), 일정 후 안정화 기간의 지원 계획(추가 제안 중 가치있는 건 이것 뿐이다. 이런저런 추가 제안을 내놓는 제안사에겐 제발 제안요청서에 있는 것만이라도 잘 한다고 말해줘,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이 있는지에 대한 것. 이것만 잘 말하면 된다.
나머지는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란다고 하거나, 굉장히 빨리 넘어가도 상관이 없다. 이것만 말해도 15분은 금방 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표자는 프로젝트관리 영역, 보안요구사항 영역과 ‘사업의 이해’, ‘핵심 세부 과업과 그 수행 전략’을 동등한 비중으로 언급한다. 높낮이가 없고 중요도에 대한 차등이 사라진다. 그러면 이 사업에서 무엇을 잘하고 싶은지,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희석된다. 평가위원으로 듣고 싶은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6. 프리젠테이션의 태도와 말하는 방법
태블릿을 들고 와서 프롬프트를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읽을 거면 눈이라도 태블릿에서 좀 땠으면 한다. 그렇게 해서 약간 더듬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PM으로서 이 사업에 대해 제안한다면 머리에서 그 내용이 그냥 나와야 한다. 그 내용을 완전히 외워서 발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PM이 간혹 있다. 이런 경우 주어진 시간을 귀신같이 맞춘다. 연습을 엄청나게 한 거지. 이건 젊은(30대) PM에게는 유효하다. 좀 귀여우니까. 그러나 40대가 넘어가면 그런 것도 피하는 게 좋다. 사업 내용 제안하며, 계약한다면 이 사업을 끌고 갈 PM이라면, 그리고 중년에 접어들어 관록이라는 무기를 보일 필요가 있다면, 청중을 장악해야 한다. 여기서 장악은 큰 목소리로 웅변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이 하는 말을 스스로 통제할 줄 알면 된다. 많은 사람은 말을 단어와 단어의 연결로만 해결한다. 특히 다수의 청중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 어떻게든 실수 없이 말하고 끝내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하고, 결국 실수는 없는 것 같지만 공허한 단어와 단어의 연결만 있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그럴싸하게만 말하고 싶은 욕심이 그렇게 만든다. 발표는 그럴싸하게 말해야 한다. 따라서 그런 욕심으로 아무 단어를 붙이며 문장을 잇는다. 문장은 이어지고 사업에 대해 말하는 것 같긴 한데 공허하고 요점이 없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통제하고 그것이 정확하게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달변과는 다르다. 말해야 할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기술이다. 사실 고난도의 기술이긴 한데, 간혹 최강록이 그렇게 말한다.
이 기술은 연습으로 되지 않을 수 있다. 가능하게 만드는 건 두 가지다. 사업 내용에 대한 완전한 숙지.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무엇을 제안하는지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시간이다. 경험이라는 말이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40대가 넘은 PM에게는 이런 걸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30대는 외워도 그것이 귀엽지만, 40대 이상에게는 그런 게 통하지 않는다.
개인의 성향상 말의 속도는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다. 큰 문제는 아닌데, 아무래도 자신이 하는 말을 통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빠른 쪽보다는 느린 쪽이 조금 더 유리하다.
7. 평가자와의 관계
어떤 평가자는 3개의 질문을 한꺼번에 던지기도 한다. 그 질문에 대해 1번부터 답하는 것이 좋다. 가장 마지막에 한 질문이 머리에 남아 3번부터 시작해 역순으로 답을 해야지 하는 순간 1번 질문을 까먹는 PM을 너무 많이 봤다. 물론 평가자가 재질문을 할 수는 있지만, 답을 하는 사람으로서, 스마트한 PM을 기대하는 자리에서 평가자가 재질문을 하도록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기억력에 자신 없으면 메모를 하자. 메모하는 모습은 PM의 훌륭한 자질로도 보일 수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답을 평가자가 원하는 경우 배석을 한 사람이 대리 답변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답변을 그 배석자가 하는 건 좋지 않다. 간혹 젊은 PM이 발표할 때, 그가 답답한 회사 대표가 배석해서 장황하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자신의 직원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물론 급했겠지만. PM은 그 자리를 통제하고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능력의 문제다.
평가자가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질문을 할 때도 있다. 자신의 전문성에 취해 지나치게 깊은 지식을 묻기도 하는데, 배석자도 답변할 능력이 없을 때는 깔끔하게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 뭐라도 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와 관련 없는 답을 하는 순간 망한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의 맥락을 정확히 알고 답변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질문과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답변을 하는 발표자는 왜 이리도 많은지. PM이 가져야 할 최대의 덕목, ‘소통’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여기까지.
제안요청서만 써봤지, 제안서라는 걸 써본 적 없는 사람이 실정도 모르고 말한다 할 수도 있겠지만, 평가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정도만 잘하면 제안서 기술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란 말이다. 자기계발서라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이 자기계발서 같은 레터를 쓰고 말았다. 이 레터에는 이유가 있다. R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