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국가유산청에서 하는 사업 설명회를 들으러 서소문동의 E 호텔에 갔다. 뜨거운 볕이 내리쬐는 금요일 오후였고, 그런 날, 굳이 점심시간이 아닌데도 진주회관에는 콩국수를 먹겠다고 줄 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럴 수 있다.
설명회가 끝난 후 바로 퇴근해 집으로 가려 했다. 날이 선명하고 빛이 났지만 너무 더웠다. 게다가 금요일은 피곤하다. 며칠 전 장마가 끝난 후의 무거운 공기와 습기가 함께 한 더위보다는 지금의 가볍고 명료한 더위가 취향이긴 했지만, 그리고 하늘의 구름도 아름답지만, 데이터는 뜨거워도 너무 뜨겁다고 말한다. 여름 기온이 40도네 오늘 어디가 그걸 넘었네 하는 뉴스가 이렇게 자주 들리면서 그게 평범한 일상처럼 되어버린 건 올해가 처음 아닌가. 적어도 내 기억은 그렇다. 1994년도 이렇진 않았다.
설명회는 질의응답 시간으로 이어졌고, 몇몇 흥미로운 질문과 교수들의 재미없는 젠체하는 애티튜드 발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즈음 부쩍 지루해졌고, 견디다 거의 끝날 때 빠져나왔다. 진주회관에는 드디어 줄이 사라졌다. 브레이크 타임이겠지.
집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교수들의 지루한 발언 때문에 난 인스타그램을 보게 됐다. 그렇게 오늘이 세계 맥주의 날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알아버린 건 내 의지가 아니다. 교수들 때문이다. 세계 맥주의 날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알려진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8월 첫 금요일이 맥주의 날이라고 한다. 세계 맥주의 날이라는데, 여름이 이토록 노골적인데, 시내에서 일이 빨리 끝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맥주는 한잔이라도 마셔야 하지 않겠나. 그 시간 그 근방에서 문을 열고 있는 펍은 단 한 곳이었다. ‘더 테이블 청진탭룸’. 더 테이블은 종로 2가 어떤 건물 지하에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청진탭룸이란 곳을 새로 연 모양이었다.
E 호텔에서 1.7km. 40도네 아니네 그런 날씨에 1.7km를 걷는 게 맞나? E 호텔을 나서며 문을 열자 몰려드는 열기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정말 가는 게 맞나? 시청과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큰길은 높은 건물들이 많으니 그늘이 있을 것이다. 세계 맥주의 날을 향한 자기 합리화였다. 거리는 관광객도 제법 많았고 그래서 외롭지 않았고, 습도가 낮은 그늘도 있어 생각보다 걷기 나쁘지 않았지만, 교보빌딩에 접어들 때 내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물리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어쩔 수가 없는 날이다. 디타워와 KT 타워의 으리으리한 빌딩 뒤로 청진동에는 아직도 복잡한 좁은 골목이 남아 있다. 그곳 어딘가에 청진탭룸이 있었고, 기껏 지금 운영 중인 유일한 펍이라 해서 1.7km를 걸어 찾아왔지만, 문 앞에는 ‘오늘은 사정이 있어 좀 늦게 문을 엽니다’ 라는 종이가 붙어있었다. 뭐라고? 세계 맥주의 날에 이게 무슨 일인가. 집에 그냥 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다 문이 열렸다.
|
|
|
나만 이곳을 몰랐나, 꽤 된 것 같은 연식의 내부 공간이 나를 반겼다. 바닥이 이미 끈적였다. 창문의 바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뒤적이다 레몬그라스가 들어갔다는 세종을 주문했다. 이 무더운 한 낮, 고도수의 뉴잉을 마시는 건 자살 행위와도 같았다. 저도수의 음용성 좋은 맥주가 나을 것이다. 주문하니 거의 500cc 파인트 잔에 세종이 가득 담겨 나왔다. 세종 정도라면 으레 300cc대의 작은 튤립 잔이나 고블릿 잔 같은 곳에 내오기 마련인데 여기는 화끈했다. 가격도 7,500원. 생각해 보니 더테이블은 늘 그랬다. 파인트 잔이 기본이었던 것 같다. 예전 엑스파일 동호회 모임을 기억 속 종로 2가 지하 1층의 펍에서 했었는데, 그때도 그랬던 것 같다. (엑스파일 동호회라니…)
에어컨이 시원하고, 펍에는 나 혼자밖에 없고, 음악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금요일 오후였다. 창 밖에는 뜨거운 햇볕 속을 힘들게 걷다 종각역으로 들어가는 직장인들이 간간이 보였다. 시원한 곳에 앉아 맛있는 맥주를 마시며 보는, 빌딩 사이 여름의 하늘은 아름다웠다. 그곳을 걸어오며 씩씩댔다는 기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의 장점 중 하나다. 짧은 기억력. 잔을 끝까지 비웠다.
이 정도면 세계 맥주의 날을 충분히 기념했다. 더 테이블의 레몬그라스가 들어간 세종은 더할 나위 없는 맥주였다. 파인트 잔으로 마음껏 들이켰다. 여전히 비어 있는 홀을 뒤로 하고 펍을 나서 직장인들이 사라지던 종각역 지하철역으로 나도 빠져들어 갔다. |
|
|
한참 후. 내가 탄 전철에서 양수에 도착하기 직전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여름의 혜택으로 밖은 여전히 밝다. 여름을 사랑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다. 하루가 길지 않은가. 유효한 시간이 매우 많은 것 같지 않은가. 무심코 폰을 봤다. 잘못 본 줄 알았다.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지역 기온이 40도였다. 40도? 뉴스에서 떠들어대던 그 일상이 내 동네까지 덮친 건가? 날씨 앱으로 들어갔다. 앞자리가 3으로 변했다. 그럼 그렇지. 아니 그럼 그렇지가 아니었다. 39.9도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내리면, 차를 공업사에 수리 맡겨놔서 주차장에는 내 차가 없고, 택시마저 없으면 2km 정도를 걸어가야 하는데 그 공기가 이 시간에도 39.9도라고 날씨 앱이 나에게 속삭였다. 속닥속닥. 앱을 닫았다.
양수리는 역에 택시가 없으면 그냥 없는 거다. 031로 시작하는 동네별 택시 거점 전화를 해봐야 하지만 아마 안 받을 것이다. 다들 더우니 택시를 찾겠지. 난 양수역 휴게실에 앉아서 크림을 얼굴과 팔에 잔뜩 발랐다. 작전 나가는 군인이 위장하듯 그렇게 비장하게 치덕치덕 문댔다. 양수역을 빠져나가니 태양은 앱이 속삭인 39.9도로 작열했고, 역시 택시는 없었다. 역 바로 앞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를 하나 냉장고에서 꺼내 계산하고 들이켰다. 그리고 이제 걷기로 했다. 해는 낮은 편이었지만, 아직 지려면 멀었다. 낮으면 뭘 하나. 39.9라지 않나. 그렇게 편의점의 차양 그늘에서 벗어나 발을 내딛는 순간.
의외로 걸을 만했다. 습기가 없었고, 일주운동의 고도는 많이 내려와 있어 공기가 뜨겁게 달궈졌 뿐 (뿐?) 각오했던 것보다는 쾌적 (쾌적?) 했다. 그럴 수 있다.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다. 2km를 걷는 수밖에. 그리고 어쩔 수 없으니, 여름의 아름다움을 보기로 했다. 웃기지 말라고? 그런데 봐 졌다. 양수역에서 집까지 가는 길이 아름다웠다. 레터 때문에 거짓말 좀 하지 말라고? 아니었다. 아름다웠다. 더없이 파란 하늘과 선명한 산등성이의 선. 아래 그림자가 있는 희고 작은 적운들. 온갖 식물들이 내뿜은 절정의 초록. 호수에서 반사되는 태양과 둥둥 떠 있는 연잎. 누군가의 집 담벼락에 달린 작은 수박. 기운 태양의 역광을 받는 공원의 나뭇잎들. 난 정말 여름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
|
|
원고는 원래 이렇게 끝이 나는 거였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토요일 저녁. 좋아하는 카페, 외대 뒤에 있는 컴플리트에 갔다. 그 카페는 지하 1층에 있지만 조금만 시선을 위로하면 넓은 입구의 큰 유리문이 보이고, 그 너머의 풍경이 보인다.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코너 길이라, 외대의 우거진 나무를 배경으로 초록색의 마을버스가 쑥 하고 들어오는 순간이 계속된다. 반대 방향으로는 배달하는 오토바이가 달리고,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불어 배경의 나무들이 흔들리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가 손잡고 웃으며 걸어가는데, 문득 ‘가을’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 우거진 나무 뒤로 해가 지며 빛이 들어오는 구멍으로 아직 단풍은 아니겠지만 왜인지 모를 붉은색의 나뭇잎 몇 개가 보였다. 정말 가을이 오고 있나? 39.9의 바로 다음 날, 그리고 입추의 다음 날 일어난 일이다. 다시 마을버스가 지나갔고, 나뭇잎은 계속 바람에 흔들리고, 해는 점점 내려가 이제 어두워지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카페에 머문 후, 컴플리트의 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나를 맞았다. 정말 가을이 오려나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