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부터 모든 계획이 흐트러진다. 원래도 느슨했던 계획으로는 저녁에 ‘1.5 닭갈비’를 먹는 것이었다. 그것뿐이었다. 통나무도 아니고 학곡리도 아닌 1.5였던 이유는, 얼마 전 학교 후배들과 만나 수다를 떨던 중 가끔 춘천에 놀러 간다는 후배가 춘천 가면 1.5도 가고… 라는 말이 퍼뜩 생각났기 때문이다. 맞다. 1.5 닭갈비라는 곳이 있었지. 유명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1.5는 이번 여행 중 가지 못한다. 춘천시청 근처의 냉면집에 들어가 후루룩 저녁을 먹는 걸로 때웠다. 뭔가,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고, 시내(춘천은 주말에 춘천시청 주차장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에 차를 대고 명동(춘천 구도심의 대표 번화가가 정말 명동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춘천시에는 명동이라는 행정구역이 없다. 1960년대 번화가를 만들기 위해 실제로 서울 명동을 벤치마킹했고 그게 지금까지도 그냥 ‘명동’이라고 불리는 거라고. 이럴 수가. 난 30년 넘게 그곳이 춘천의 행정구역상 ‘명동’인 줄 알았다. 내가 그렇게 말해준 사람들이 100명인데, 틀린 정보 죄송합니다!)을 둘러보는 것도 재밌겠다 했다.
춘천 명동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지방 도시의 대표 상권에 ‘여전히’ 사람이 많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고 위안이 되는 일이다. 마음이 놓이는 구석이 있다. 인형 뽑기와 가챠숍이 즐비한 가운데, 명동 한복판에 ‘하우동설’이라는 이름의 서점이 보였다. 원래 있었나? 강풀의 <조명가게>에서 어울리지 않는 ‘조명가게’가 어두운 동네 끝에 있었던 것처럼 서점은 명동과 이질감이 있었다. 호기심에 문을 열고 들어갔고, 매장은 넓은 편이었다. 실용서와 학생 교재도 판매하지만 하우동설은 적당히 상업적인 큐레이션을 하는 곳이었다. 이를테면 물이 들어온 ‘오디세이아’와 ‘일리아스’의 여러 버전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잔뜩 진열하고 있다던가. 그 외 잘 팔릴 만한 서적(무라카미 하루키라든가)들이 보였고, 너무 독립책방 느낌은 없는, 단정한 느낌의 상업 서점 같았다. 들어갔으니 책 한 권은 살 요량이었고,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샀다. 50주년 기념 제4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2013년에 나온(번역된) 책이다. 군대 내무반에서 이 책을 읽는 선임이 있었다. 대충 알고만 있었던 이 책을 와 이 사람이? 하던 놀라움을 지니고만 있다가 이제서야 그 책을 샀다. 역시 30년 넘게 걸린 일이다.
서점을 나와, 너무 오랜 시간 건물만 유지한 채 폐업하고 있는 피카디리 극장 앞의 ‘명곡사’가 눈에 띄었다. 역시 ‘하우동설’과 비슷한 느낌의 가게다. 모든 불이 꺼진 길에 혼자 불이 켜져 있는 음반 가게. 음반 가게라는 조어 자체도 어두운 골목 끝 조명 가게만큼 신비롭다. 여긴 내가 학교를 다닐 때도 있던 곳인데, 별다른 추억은 없다. 분명히 무슨 앨범을 사긴 했을 텐데. 이번에 들어가서는 정태춘과 박은옥 앨범을 찾았다. 폐가식처럼 되어 있어 직접 앨범을 찾는 재미는 없지만, 오래된 도서관에서 연륜 있는 사서에게 이런 책 있나요? 라고 하면 신비롭게 그 책을 찾아주는 소설 속 에피소드처럼, 명곡사와 함께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켰음이 분명한 주인아저씨에게 정태춘과 박은옥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는 2단 CD장을 능숙하게 이리저리 열고 닫으며 몇 개의 CD를 찾아줬다. 그중 10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를 샀다. 10집이라지만 2002년 발매 CD로 24년 전 앨범이다. 물론 당시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수십 년 가게에 있던 어떤 물건이 판매될 때, 그게 맞긴 하겠지. 하지만 CD 가격이 25,000원인 시대에 일만 원대 초반에 새 CD를 사는 건, 아무래도 시간을 거스른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첫날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글이 길어지는데 둘째 날은 다음 레터로 이야기할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여행 이야기는 하는 김에 완료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흥은 일상에 묻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다음 날 아침 역시, 전혀 일정에 없던 도원 뚝배기짬뽕(명동점)에서 시작했다. 10:30에 문을 여는데 나름의 오픈런이 있는 짬뽕집이었다. 뚝배기에 계속 끓인 듯한 상태로 먹다 보니 국수에서 전분이 나와 국물이 녹진해지고, 회전이 빨라 홍합과 조개류는 신선한 느낌이었다. 군인과 아저씨들이 홀을 가득 메웠다. 아침부터 부른 배를 산책하며 진정시키기로 했다. 식당 바로 앞은 조운동 행정복지센터인데, 그 일부를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이름은 ‘아이디어 도서관’. 도시를 걷다 보면 어딘가 문득, 동네의 작은 도서관들이 많이 보인다. 책 종류는 많지 않지만 주민들이 들어와 쾌적하게 쉴 수 있는 곳, 책도 읽고, 공부도 하는 공간. 이런 작은 도서관은 생기면 무조건 사람들이 거의 가득 찬다. 모든 동네에 필수로 있으면 좋겠는 곳, 거창할 필요 없고 그저 그 기능만 하면 되는 깔끔한 곳이면 좋겠다. 아이디어 도서관은 그러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상당히 컸다. 1층은 일반 도서관 느낌이었는데 2층과 3층 공간이 재미있었다. 2층은 만화 전문 도서관이었다. 온갖 만화 명작들을 전권 다 구비하고 있었는데, 놀랍게 다 멀쩡했다. 도서관이 문을 연 지 얼마 안 됐거나, 이곳 사람들이 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조사해 보니 개관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곳이었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여기 죽치고 앉아 <드래곤볼> 전권을 섭렵하고 나가도 됐을 것 같은데, 조만간 기회가 있을까. 3층은 트윈세대를 위한 공간. 트윈세대라는 말 자체를 처음 듣는데, 초4~중2의 어린이와 청소년 사이의 세대라고 한다. 그 격변의 시기에는 이런 구분도 필요한가 보다, 하며 3층에 올라간 순간 저지당했다.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3층은 트윈세대 아이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으로 보드게임룸, VR 게임룸, 노래방 등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보호자조차 동행이 안 되는 초4~중2만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재미있네? 이런 신기한 기획이 공공 부문에 들어올 때는 그 결재 라인이 난 무척 궁금하다.
도서관에서 나온 후에는 그 근방, 조양동과 조운동을 산책했다. 아주 오래된 구도심의 단독주택이 모여있는 곳. 잡초가 우거진 공터도 있고, 피카디리 극장처럼 텅 빈 큰 건물도 많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사는 마을이었다. 집도 오래됐고 집 안의 나무들도 오래되어 울창한, 전혀 정비되지 않아 구불거리는 골목들을 걷는 것, 적어도 산책자에게는 이로운 일이다. 그런 오래된 집 사이사이에 제법 많은, 세련된 카페가 문을 열고 있었다. 이런 오래된 느낌과 새로운 가게가 오래 공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는 편리한 바람일 테지만, 그래도 이런 공간이 춘천에 오래 있다면 더 자주 놀러 오고 싶을 것이다. 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날씨와 조양동, 조운동 골목의 풍경이 잘 어울렸다. 저런 집을 사서 정원을 가꾸고 노년을 보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드는 집도 몇 채 있었다. 이 산책은 죽림동 주교좌 성당까지 이어진다. 종교는 없지만 성당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는, 여행지에서 가끔 성당을 방문한다. 절을 방문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죽림동 주교좌 성당은 춘천제일종합시장 바로 옆에 있었는데(팬더하우스를 그렇게 갔었는데!) 이번에야 방문할 수 있었다. 그 어지러운 동네 바로 위 언덕에 자리 잡은 성당은 고요했다. 다만 5인치짜리 주황 형광색 반바지를 입은 나로선 성당 곳곳을 누비기에 조금 민망해 대충 돌고 급히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