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맥주가 있는데 없다
지난 2월 스타필드 하남 지하 1층 와인클럽이 문을 닫으면서 대대적인 할인 행사를 했다. 물론 ‘와인클럽’이니까 와인이 주종이었지만 의외로 맥주 전용 냉장고도 많아서 스타필드에 갈 때마다 어떤 맥주가 있으려나 구경하는 재미도 꽤 좋았다.
크래프트맥주를 의욕적으로 들여오더라도 생각만큼 판매가 되지 않아 그 판매 면적이 줄어들거나 파는 맥주의 종류가 뻔해지거나 하는 경험을 너무 많이 했다. 믿을 수 있을지 몰라도 몇몇 이마트와 홈플러스의 맥주 코너에 꽤 다양한 맥주가 있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대략 10년 전 이야기다.
스타필드 하남의 와인클럽은 어느 쪽이냐면, 그 종류가 조금씩 단순해졌다. 그중 끝까지 남아있는 건 영국의 크로스오버 블렌더리(Crossover Blendery) 브루어리와 미국 플로리다의 사이클 브루잉(Cycle Brewing) 맥주였다. 정말 끝까지 잔뜩 남아있었다. 일단 비쌌다. 크로스오버는 한 병에 35,000원(750ml) 정도였고 사이클 브루잉은 58,000원(650ml) 정도였다. 양이 좀 많아서 그런 가격인가 보다 해도 맥주 한 병을 이 가격에 사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맥덕이 맥주 파티를 자주 하는 사람들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그저 혼자 좋아서 마시는 사람들이다. 그 맥덕이 집에 들어간다고 맥덕 2가 기다리고 있을까? 천만의 말씀. 반경 5km 안에서 또 다른 맥덕을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외로운 존재다. 그들은 집에 가서 맛있는 맥주를 홀짝거리고 싶을 뿐인데, 750ml? 부담스러운 양이다. 그리고 650ml인데 14도 배럴 에이징 임페리얼 스타우트라고? 불가한 거다.
와인클럽이 문 닫기 며칠 전 주로 할인한 맥주가 이것들이었다. 맥덕도 사갈 수 없었던 맥주들. 계산해 보면 90% 세일. 내가 뭘 사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D가 크로스오버 블렌더리와 사이클의 맥주를 종류별로 쓸어 카트에 담았다. 직후 나의 반경 5km 밖에서 살 거라 추정되는 두 명의 맥덕이 역시 냉장고를 뒤져 쓸어 담았는데 남아있는 종류가 완전하지 않아 우리의 카트를 부럽다는 듯 바라보곤 사라졌다. 이런 게 또 쾌감이긴 하지.
자,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맥주 파티를 한 번 했다. 그리고 왕십리의 어느 주점에서 12도짜리 맥주를 마셨다고 주장한 팀원이 퇴사한다기에 냉장고에 있던 사이클 브루잉의 정말 12도짜리 맥주를 퇴사 선물로 줬다. 이게 진짜 12도니 절대 혼자 까지 말고 친구들과 함께 마시라고(앞으로 모든 일에 행운이!). 그러다 보니 지금 집 냉장고 가장 아래 칸, 신선실에는 맥주가 엄청나게 쌓여있다. 혼자 먹기 힘드니 소비되지 않는 데다, 집에 이렇게 맥주가 많으니 (가볍게 소비할 맥주라 할지라도) 맥주를 더 사는 것이 꺼려진다. 이렇게 냉장고에 꽉 차 있는데 뭘 또 맥주를 사, 이런 느낌? 하지만 외로운 맥덕이 TV를 켜고 홀로 거실에 앉아 깔만한 맥주는 또 냉장고에 하나도 없다. 결국 냉장고에 맥주는 있지만 없는 셈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냉장고를 다시 뒤졌다. 정말 ‘없음’인 건가. 사이클 브루잉은 정말 불가능이고, 크로스오버 블랜더리를 한번 볼까?... 했는데, 750ml로 양이 많긴 하지만 도수가 6.5도인 것도 있네? 이만하면 괜찮지 않나. 밀 맥아와 체리가 들어간 페일 윗 비어(Pale Wheat Beer with Cherries)를 꺼냈다. 밀맥주에 체리를 넣었다니... 잘 모르겠다. 켄트 지역에서 재배한 신맛이 많이 나는 모렐로 체리를 넣었다는데 그래서 산미가 가장 많이 나지만 그걸 밀 맥아가 살짝 균형을 잡아주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개한 테이스팅 노트, 아몬드 향 오크 향 이런 건 정말 전혀 모르겠다. 내가 평소에 즐기는 맥주와는 살짝 거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