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투 퍼디션>(샘 멘데스, 2002)을 다시 봤다.
이 영화에서 좋아하는 여러 가지 중 하나는 토마스 뉴먼의 음악이다. 마이클 설리반(톰 행크스)이 아들과 함께 시카고로 진입하는 순간의 음악(Road to Chicago)을 잊지 못한다. 가장 좋아하는 트랙은 ‘The Farm’이다. 갱 조직원이지만 어딘가 슬퍼보이는 설리반의 전반적인 무드를 이 트랙이 말해주는 것만 같다. 풍성한 현의 연주가 매우 아름답다.
<로드 투 퍼디션>은 콘래드 홀의 유작이기도 하다. 중절모를 쓰고 검은 코트를 걸친 덩치 큰 남자들의 실루엣과 자동차, 밤거리, 쏟아지는 비, 가로등 조명에 의한 명암대비는 회화 같다. 실내에서도 정교하게 빛이 통제되는데 렘브란트의 그림 같기도 하다. 대공황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거친 갱이 주인공이고 사람도 죽어나가지만 통제된 빛 때문에 이 영화는 정적이고 차분하게 보인다. 콘래드 홀이 설계한 빛과 어둠의 극명함을 아쉽지만 필름 상영을 통해 극장에서 다시 보기는 힘들 것이다. 디즈니+의 디지털 버전도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로드 투 퍼디션>을 필름으로 봤다. 한국에서 개봉하기 얼마 전, 2002년 8월 31일의 일이다. 이 작품은 2002년 베니스국제영화제의 공식 상영작이었고, 당시 베니스 광장 야외 상영장에 내가 있었다.
2002년 8월 30일 저녁, 파리에서 밤 기차를 타고 다음 날 아침 베니스에 도착했다. 베니스로 진입하는 창밖 풍경은 기차가 바다 위를 미끄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날 하루 종일 베니스를 돌고, 밤에 다시 심야 기차를 타고 다음 행선지인 로마로 가는 일정이었다. 고된 여정이었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베니스를 볼 시간은 넉넉했다. 배낭을 기차역에 맡기고, 미로 같은 골목을 걸으며 사진으로만 보던 그곳을 마음껏 걸었다. 아침에 빵 하나를 사 먹은 것 말고는 뭘 먹었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대신 풍경을 기억한다. 붉고 오래된 건물들, 물길, 곤돌라, 다리.
당시는 베니스국제영화제 기간이기도 했다.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섬에 가는 길, 어떤 광장에 야외 상영관이 있는 걸 발견했다. 일정표를 보니 밤에 <로드 투 퍼디션>을 상영한다고 했다. 영화 시작은 밤 9시 30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로마행 밤 기차를 타야 해서 영화를 다 볼 수는 없었지만, 한 시간이라도 보자는 마음에 표를 끊었다. 그리고 리도섬으로 향했다. 아무 정보도 없이 간 터라 그 때 상영하는 영화를 그냥 티케팅 해서 봐야 했다. 일반인 자격으로 가서 영화를 볼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나는 그냥 표를 팔길래 아무 영화나 표를 사서 극장에 들어갔다.
극장에 들어가기 위한 줄이 3개였다. 당연히 가장 사람이 많은 줄 뒤로 가서 서있는데, 내 앞의 사람이 당신은 저쪽으로 가면 된다고 안내했다. 사람이 없는 두번째 입구 줄. 알고 보니 가장 긴 줄이 프레스 혹은 요즘 말로 배지 목걸이를 걸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고, 사람이 없는 줄은 일반 관람객을 위한 줄이었다. 내 앞에 한두 명 있었나. 유럽의 국제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랑 좀 다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누구보다도 빨리 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좌석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극장 안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고, 알 수 없는 흑백영화가 상영됐다. 오래된 이탈리아 영화였고, 다행히 스크린 아래에 영어 자막이 나와 조금은 이해하며 영화를 따라갔다. 영화의 줄거리 같은 것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재미있었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다만 영화가 끝난 후, 객석의 누군가 일어나 인사를 했고 객석의 사람들은 그를 향해 박수를 쳤다는 것. 그 사람이 누군지는 지금까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흑백영화의 정체도 난 알 수 없었다. 그냥 사람들에게 20여 년간, 베니스 영화제에서 영화를 하나 봤는데 말야, 이탈리아 어떤 노장 감독의 회고전이었나봐, 영화 제목? 몰라. 그냥 본 거지 뭐. 재미있었냐구?. 몰라. 베니스에서 영화 본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실은 그 다음에 <로드 투 퍼디션>을… 늘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이 글을 쓰려고 조사해보니, 회고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였다. 2002년 베니스 영화제는 안토니오니 회고전을 대대적으로 열었고 많은 작품을 복원판으로 상영했다. 내가 본 것은 〈정복된 사람들 I vinti〉(1953)의 2002년 복원판이었다. (나는 이 여행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영화를 복원하는 ㅇ모기관에 취직하게 된다.) 그렇다면 객석에서 일어나 인사한 사람이 안토니오니였을까. 잔뜩 흥분해 찾아봤지만 아니었다. 그는 9월 이후에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비쳤다는 기사만 나왔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일어나 박수를 쳤으니 그 영화와 관련된 중요한 인물이었겠지. 조금 노쇠한 남자였다.
다시 본토로 돌아가 <로드 투 퍼디션>을 상영하는 야외 상영장에 도착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난 구석 자리를 잡았고,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어두워졌고, <로드 투 퍼디션>이 야외 상영장의 거대한 스크린에 영사됐다. 불행히도 그 순간, 영화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중절모를 쓴 심각한 표정의 톰 행크스, 콘래드 홀의 촬영, 토마스 뉴먼의 음악, 샘 멘데스의 연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영화의 파편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다만.
다만,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냄새와 소리다. 야외 상영장 밖, 광장의 식당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 그리고 영화 소리 말고 광장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소음. 그 순간 난 영화보다 극장 밖 공간에서 풍기는 냄새와 흐르는 소리에 더 집중했다. 여행객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영화제 참관자라면 <로드 투 퍼디션>에 집중했겠지만, 난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이 영화를 한 시간만 보고 중간에 나와 수많은 다리를 건너 기차역까지 서둘러 가야만 하는 여행자였다. 눈 앞의 스크린도 감각 안에 들어오고 있었지만, 내 머리 위와 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도 동시에 감각이 열렸다. 그 순간, 영화를 제외한 감각에 내 마음을 더 빼앗기고 말았다. 국제영화제 공식 출품작인 <로드 투 퍼디션>보다 야외 상영장으로 들어오는 베니스의 냄새와 소음이 나를 사로잡았다.
시간이 됐고, 중간에 나와 베니스역으로 향했다. 구글지도가 없던 당시 몇 번을 막힌 길로 가며 헤매다, ‘베니스에서 죽다’라는 것이 결국 미로에서 죽는다는 말인가를 투덜거리며 겨우 기차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난 로마 일정을 시작한다. 이 여행이 지금까지 나의 유일한 유럽 여행이 된다.
한국에 돌아와 극장에서 상영하는 <로드 투 퍼디션>을 바로 봤는지, 아니면 나중에 DVD 같은 걸로 봤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하지만 끝까지 다시 본 것만은 확실하다. 20년 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난 지금, 영화를 다시 보고 있자니 모든 장면들이 고스란히 기억났다. 마지막 흰 집 장면까지.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2026년 이 영화를 볼 때도 2002년의 그 냄새와 소음이 고스란히 기억난다는 것이다. 피자였던 것 같은 음식 냄새와, 뭐라는지 알 수 없는 꽤나 시끄러웠던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 울림이 공기에 퍼져 야외 상영관의 구석 자리에 앉는 한 여행객에게 도달하기까지의 순간. 모든 것이 뒤섞인 광장의 밤. 그것이 나의 베니스국제영화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