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가지 이야기
#1
회사 일이 바쁘다. 우리 팀은 여러 사업을 추진하며 동시에 여러 평가를 마감하는 중이다. 기관 지방 이전도 말만 많지 확정되지 않았고, 우리 기관이 운영한다는 박물관 부지도 1년이 넘도록 미정이다. 조직 개편도 곧 예정이고, 그에 따른 인사 조치도 목전이다. 나는 3급 차장 직급을 단 일반 담당자로 내려갈 수도 있다. 8년 팀장 했으면 오래 했다. 매일 쳐내야 할 회의도 상당하고, 하나하나가 진을 뺀다.
이 어수선함과 바쁨에 대해 레터 하나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읽는 사람은 지루할 것이다. 나의 바쁨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2
출장으로 S와 대전특수영상영화제에 다녀왔다. 역 근처에서 칼국수를 먹고 메가박스로 가 AI 영화를 관람했다. 시댄스를 이용해 전체를 AI로 만든 영화도 있었고, 실사를 병행한 하이브리드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게임 엔진으로 만들었다는 미디어 아트 영상도 있었다. 어떤 AI 영상은 익히 알고 있던 그 질감 그대로였지만, 어떤 AI 영상은 풍경이 실사와 매우 흡사했다. 실사인지 아닌지 웅성거릴 정도로.
미디어 아트를 출품한 사람이 GV를 하며 내가 왜 이 자리에 와 있는지 모르겠다는 운을 떼며 자신의 영상은 AI로 만든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영화는 자고로 감독과 배우, 스태프가 어떤 공간에서 촬영하며 함께 시간을 관통해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라 생각한다며, AI로 만들어진 영상은 영화가 아니라는 말을 단호하게 했다.
그 바로 옆은 대학 영화과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감독이었다. 자신은 영화를 전공했지만 단 한 번도 필름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디지털로 찍었다는 말이다. 언젠가는 AI로 영상을 만드는 시대의 사람들이 기본이 된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즉, 내 옆에 앉은 꼰대야, 너무 그러지 말아라, 는 젊은 감독의 일갈이었다.
S와 택시를 타고 대전역으로 가며 기관이 수집해야 할 영상이 무엇인지를 드문드문 이야기했다. 미디어 아트의 영상, 미술에 사용되는 영상, 수집해야 하는가. 고민해봐야 한다. 대중문화로 아카이브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우리가 수집해야 할 것에 대한 팀 단위가 아닌 기관의 관여가 있어야 하지 않나. S는 동의했다. 역시 고민이 필요하다. AI 영상 수집해야 하는가. 역시 기준이 필요하다. 즉, 고민이 필요하다.
GV에서 누군가 말한 것처럼 정말 영화란 그런 걸까요? 공간과 시간, 뭐 그런 거. 꼰대는 꼰대인데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다는 S. 나도 그랬다. 모처럼 기관 사업에 대한 큰 둘레의 이야기를 나눴다.
택시 기사가 말을 걸었다. 뭐 하시는 분들이냐고. 1999년생 젊은 기사였다. 영화 관련된 공공기관에 다닌다고 했다. 기사는 밑도 끝도 없이 와, 멋지네요, 그랬다. 우리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대전역에 택시가 거의 도착했을 때, 기사는 넷플릭스와 티빙을 구독한다며 영화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했다. 난 필사적으로 썸네일을 넘기며 <추락의 해부>를 추천했다. S는 결국 추천하지 못했다.
#3
일요일에는 팀원 K의 결혼식이 있었다. 30만 원짜리 화장이 잘 먹은 신랑은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화장 잘 먹었어! 라고 악수하고 축의금을 전달한 후 식장에 들어갔다.
축가를 신랑 K가 부른다는 소문이 들렸다. 회사 생활을 하며 단 한 번도 K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 K가 노래를 잘하나? 굉장히 내성적인 성향인데, 축가를 할 정도면 엄청나게 노래를 잘 부르는가 보다. 기대했다.
코나의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전주가 흘렀고 K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걸어 나왔다. 노래가 시작됐다. 그는 음치였다.
음은 거의 맞지 않았고 고음도 잘 올라가지 않았지만 애썼으며, 박자는… 그리 틀릴 게 없는 노래긴 했다. 근사하게 노래를 뽐내는 신랑, 엄청나게 노래를 잘하는 친구의 축가, 진짜 가수를 섭외해서 부르는 축가. 그간 여러 결혼식에서 여러 축가를 봐왔다. 미안하지만 다 별로였다. 축가라는 것 자체가 그리 달갑지가 않다.
그런데 K의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는 달랐다. K는 정말 열심히 불렀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1997)에서 카메론 디아즈의 음치가 폭발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그 영화에서도 노래 초반 ‘You suck!’ ‘Next!’ 이런 고함이 들리다 결국 모두가 박수를 치며 응원하게 된다. 그날 내 앞에 앉은 한 어르신도 ‘연습 좀 하지’라는 말을 나지막이 뱉었지만, K는 노래를 끝까지 완곡했고 박수를 받았다. K는 노래를 마치고 환하게 웃었다. 신부도 웃고 있었다. 난 가장 크게 박수 쳤다. 감동적이었다.
어떤 기발한 결과물이 개인이 아닌 회사에서 나왔을 때. 그 기발한 생각을 누군가 했겠지만, 난 그 당사자보다 결재 라인을 궁금해한다. 결재 라인에 들어간 모두가 대단하다고 믿는 쪽이다. 그리고 그 라인은 그 회사를 말한다.
이번 축가가 어떻게 기획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신부가 제안했는지 신랑이 제안했는지… 신부가 제안했을 것 같다. 거기에 K는 동의했고, 얼마나 연습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완곡을 했다.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신부를 위해 백여 명의 하객이 있는 앞에서 용감한 무대를 만든 것이다. 좋은 결재 라인을 탔다. 내 생애 최고의 축가였다. 잘 살길. 분명히 잘 살 것이다.
#4
카이스트 AeG 48기 홈커밍 데이에 다녀왔다. 49기도 신입생 환영회처럼 함께하는 자리였다. 늘 그렇듯 한 명씩 일어나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회식 자리는 경희대 앞 ‘두레박’이었고 그곳은 ‘유성관’ 식당 바로 앞에 있다. 참고로 ‘유성관’은 내 이름이기도 하고 경희대 근처에 있는 식당 이름이기도 하다. 두레박에서 창밖을 보면 ‘유성관’이라는 식당 간판이 아주 크고 분명하게 보인다.
48기 신입생 환영회 때(그때도 두레박에서 했다)는 그게 신경 쓰여서 내 이름을 아주 작게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제 이름은 유성관이고 저 창밖을 보시면 제 이름이 있습니다.
약간의 쇼맨십. 사람들이 창밖을 봤고 신기해했다.
그 후로 여러 사람의 소개가 지나가다 중후한 중년 남자가 일어나 입을 열었다. 그는 느닷없이, 창밖에 있는 유성관 옆에 제가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를 비롯해 다들 무슨 소린가 했는데, ‘유성관’ 식당 간판에는 ‘유성관 착한한우’라고 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한한우였다. 다들 너무 웃었다.
2차로 치킨집에 가서 맥주를 좀 마시다 먼저 일어났다. 어쩐지 예전의 카이스트 모임보다 좀 더 편해진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보였고, 느슨했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편했다. 종종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될지 모르겠다.
#5
추석 연휴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 함이었다. 청소하고 밥 해 먹고 TV 보고 자고, 그게 계속 루틴으로 돌았다. 아주 좋았다는 말이다.
내일부터는 좀 더 빡센 루틴이 돈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니 이제 값을 치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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