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지안 비어 위크엔드 코리아(이하, 벨기에 맥주 축제)가 올해로 2회째라고 했다. 일찌감치 얼리버드 티켓을 예매했고, 토요일 14시부터 입장 시작이라길래 D와 B를 현장에서 14시에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커먼그라운드였다.
좀 늦을 거라던 B가 먼저 와서 코인을 교환하기 위한 줄에 서 있었다. 티켓을 일찍 구매하면 전용잔과 함께 27,000원 상당의 코인을 13개 받고, 축제 내부에서 코인으로 값이 환산된 맥주를 사 마시는 방식이었다. 이게 코인이다 보니, 보드게임의 가짜 화폐 같은 걸로 교환하는 느낌이라 맥주가 얼마나 비싼 건지에 대한 개념이 흐려지기도 한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이날 마신 가장 비싼 맥주는 코인 11개짜리였다. 한 잔에 29,700원. 나와 D도 코인을 교환하기 위한 줄을 섰는데 뒤에서 B가 그랬다.
오빠, 이거 신분증 확인하더라고요.
B는 나보다 약간 나이가 어리다. 내 나이 50대 중반. 신분증 확인이라니. 설레는 마음으로 모바일 신분증 앱을 미리 켜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티켓을 확인하고 코인을 받고, 팔찌를 채우면서 모든 것이 물 흐르듯 끝나버렸다. 뒤를 돌아보며 B에게 외쳤다.
신분증 검사 안 하잖아!
그랬더니 스태프 1이 웃으며 말했다.
신분증 검사해 드릴까요?
그 후 스태프 2도 말했다.
어떤 분은 한다고 뭐라 하시고 어떤 분은 안 한다고 뭐라 하시니 저희도 참 힘드네요.
다들 웃었다. 신분증 검사는 결국 하지 않고 입장했다.
100여 종의 맥주가 있었고, 나로서도 어떤 맥주들인지 알기가 쉽지 않았다. 몇몇 유명한 맥주를 제외하곤 다 낯설었다. 맥주는 코인 2개부터 13개까지 다양했고, 드래프트 혹은 병맥주로 서빙됐다. 아무튼 내가 받은 맥주 전용잔에 꽉 차는 정도의 양만. 어쩔 수 없이 드래프트 위주로 마시기 시작했고, 이날 최고의 맥주는 드래프트로 나온 ‘로슈포르 트리플 엑스트라’였다. 코인 4개. 가격도 합리적이고, 이 축제를 위해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맥주라고도 했다. 로슈포르는 그간 6, 8, 10 시리즈를 자주 마셨지만, 트리플 엑스트라는 처음이었고, 서빙하는 스태프도 자기도 처음인데 맛있네요, 라며 덩더기러러 장단을 맞춰줬다. 결국 그날 중복해서 구매한 유일한 맥주가 된다. B는 전문 불어 번역가이고 D도 불어에 익숙하다. 그들의 Rochefort 발음이 로슈포르가 아니라 허… 뭐라는 말을 들으며 난 잔을 세척하러 갔고, 그 후로도 여러 가지 맥주를 마셨다.
사람은 적당했다. 너무 적어서 축제 느낌이 안 나는 것도 아니었고, 너무 많아서 감당 못할 그런 정도도 아니었다. 자기가 마시고 싶은 맥주를 결정만 하면 거의 줄 서지 않고 마시며, 서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술 축제의 재미있는 점은 그 과정이다. 나와 함께 들어온 사람들이 점점 취해가는 걸 볼 수 있다. 다들 얼굴이 벌게지고 말이 많아진다. 나도 물론 그럴 것이고, 심지어는 서버들의 얼굴도 벌게지기 시작한다. 다들 풀린다. 노원 맥주 축제가 너무 넓은 공간이라면, 벨기에 맥주 축제는 좁은 공간에서 압축적으로 술이 한 잔 들어간 흥을 다 같이 공유하게 해준다. 조금 더웠지만 다행히 구름이 있어 견딜 만했던 가을의 한낮. 사람들은 취해갔고, 안주는 맛없다고 투덜거렸지만, 맥주는 맛있어서 우리는 인당 3잔 정도씩 마셨다. 물론 코인은 추가 구매했다.
3분수 맥주를 서빙하는 부스에서 코인 11개짜리 한정판 맥주가 있는 걸 내가 계속 쳐다봤다. 그걸 안 B가 부추겼다. 그래서 마셔봐야 하지 않나. D도 동의했다. 언제 마셔 보겠나. 결국 3명의 코인을 합쳐 11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맥주를 받으러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마시기 힘든 한정판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가 아니면 내가 비싼 대가를 지불해서라는 보상 심리 때문인가, 라즈베리와 체리가 들어간 람빅 계열인데 신맛이 전혀 도드라지지 않고, 꿉꿉한 느낌도 아주 기분 좋은 정도라 좋은 맥주임은 알겠더라. 나와 D, B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그날 최고의 맥주는 로슈포르 트리플 엑스트라였다.
이후, 커먼그라운드를 나와 현시점 서울에서 가장 사람이 많은 성수동 메인 스트리트를 관통해 서울숲까지 걸었다. 사람은 어느 순간 금방 사라졌다. 도착한 서울숲에도 사람이 꽤 있었지만, 성수동 메인 스트리트에 비할 것은 아니었다. 어디고 외국 관광객들이 가득한 공간을 보며 우리는 언제 서울의 브랜드가 이렇게 됐냐며 놀라워했다. D와 B, 그리고 나는 정비가 잘되어 있는 서울숲을 천천히 걸었다. 식물도 보고, 나무를 보며. 추분을 지난 10월, 날은 빨리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을를 서울숲점’으로 향했다. 테라스 좌석이 남아 있었다. 을를에서 늘 마시는 ‘대멸종’을 주문했다. 책에 썼던 ‘빵맥주’는 여전히 없었다. 마침 노을이 지는 시간이었다. 조금 전 벨기에 맥주들을 그렇게 마시고 다시 서빙된 맥주를 들이켰다. 모기 한두 마리가 날아다녔지만, 밖에서 맥주를 한잔하기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었다. 첫 맥주잔이 점점 비워져 갔고, 우리의 등 뒤 하늘은 점점 붉어졌다.
안주가 나왔고, 평범한 치킨인 줄 알고 주문했는데 처음 보는 비주얼의 접시가 올려졌고, 남아프리카 방식의 치킨 요리라는 서버의 설명이 있었다. 서버도 설명하다 한 번 말이 막혔다. 아니 을를은 왜 이렇게 음식에 진심이야, 라며 남아프리카 계열의 치킨 안주와, 남은 대멸종을 마셨고, 서버도 설명하다 현타 온 것 같지 않아? 라며 실없이들 웃었다. 하지만 치킨은 맛있었고, 대멸종 이후에 주문한 다른 맥주들도 좋았다. 어린 시절 떡볶이가 얼마였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다음에 영천시장의 떡볶이를 먹고 ‘브루어리 304’를 같이 가자. 가을이 가기 전에. 그렇게 느슨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하늘은 이제 붉은 빛을 감추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