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떡에 찬밥
계떡은 틈새라면의 메뉴 중 하나다. 매운 라면으로 유명한 그곳에 전혀 맵지 않은 라면이 있으니 그 이름이 ‘계떡’이다. 비교적 맵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고 정말 스코빌 지수가 0이(일 것이)다. 외국인에게 튀김우동 컵라면을 먹이면서 맵다는 반응을 보여주는 쇼츠가 있는데 (너무 놀랍지 않은가, 그게 맵다니!), 그들에게 똑같이 계떡을 먹이면 매운맛이 정말 하나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 라면이다.
계떡은 콩가루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나도 몰랐는데, 내가 계떡을 먹고 있을 때 다른 손님이 들어와 엉거주춤 계떡을 주문하면 주인장은 꼭 확인한다. “이 라면은 콩가루로 만든 거예요.” 거기까지만 말하지만 그 뒤에는 ‘그래도 드실 건가요? 컴플레인 같은 거 걸 거 아니죠?’ 이런 말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내가 주문할 때도 물어보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가게를 들어서면서 계떡을 먹고야 말겠다는 기세로 “주인장, 여기 계떡 하나 주시오”라고 우렁차게 외치는 건 아니겠지만, 그냥 상암동 틈새라면에 갈 때마다 계떡을 시킨 지가 15년은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주인장도 이제 그걸 안다.
“마스터, 늘 마시던 걸로” 누아르 물에서 어둑한 술집에 들어간 주인공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불가능한 대사다.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서 목격자가 말하는 그 사람처럼 난 어디 가서 인장이 박히는 얼굴이 아니다. “그냥 평범해요, 평범하게 생겼어요” 그런 나는 지나치는 그 누구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 가게에서는 가도 가도 새로운 손님이고, 가끔 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인사하면 저 사람이 날 기억하려나? 라는 두려움을 늘 갖는 상대방이다. 이걸 해결해 주는 유일한 것은 긴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반복뿐이다.
회사에서 점심 동료가 죄다 사라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난 옆 건물 지하에 있는 틈새라면을 찾는다. 지난주에도 그렇게 갔고,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다 나와 눈이 마주친 주인장의 눈동자에는 단골이 왔구나, 하는 반짝임이 있었다. 그에게 나는 늘 혼자 와서 계떡과 찬밥을 시키는데 반찬 중 단무지는 거절하는 손님으로 어렴풋이 각인된 것 같다. “계떡에 찬밥 주세요”, 하면 아 맞지, 하는 정도의 리액션으로 주문을 받고 “반찬 뭘 안 드시더라?” 라고 물으면 난 “김치만 주시면 됩니다”, 라고 답하고 자리에 앉는다. 물을 가져다주는 주인장은 나에게 굉장히 오랜만에 왔다며 인사했다. “맞습니다” 허허허. 마스터, 늘 먹던 걸로 주시오. 이곳은 어쩌면 나에게 그게 가능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계떡이 무엇이길래. 라면인데, 주인장이 밝혔듯, 콩가루 기반이라 맵지 않고 구수하다. 거기에 콩나물과 떡, 풀어지지 않은 달걀이 함께 한다. 라면 국물이 콩가루라니! 우웩! 아니 잠깐! 라면 국물의 구수함이 그냥 누룽지처럼 구수하기만 한 건 아니고 기본적인 라면수프의 염도가 있다 보니 맵지는 않지만 구짠구짠(구수하고 짠)한 어디에도 없는 신비한 라면이 되어버렸다. 그 국물과 함께 틈새라면 특유의 꼬들한 면을 절반 정도 먹고 조금씩 찬밥을 말기 시작하면 그게 또 난리 난다. 고전 TV 프로그램 <호기심 천국>에서 밥을 말아 먹기 가장 맛있는 라면은 ‘스낵면’이라고 결정했었는데, 아니다, 계떡이다. 구짠한 국물이 식어서 갈라지기 시작한 밥알의 틈으로 파고 들어간 그것을 왕창 떠서 먹는 맛은 다른 라면과 분명 다르다. 그래 난 이 라면이 그렇게 맛있더라. 이렇게 써놨지만, 적극 추천하기엔 조금 망설이는 중이다. 주변에서 계떡을 맛있게 먹은 사람이 없거든. 그냥 나만의 쏘울푸드 같은 게 틈새라면에 운 좋게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궁금한 분들은 시도해 보시라.)
마지막으로 라면 팬으로서 한 가지 팁. 난 이러저러한 요리 경험 끝에 최적의 레시피를 찾았다는, 혹은 맛있게 먹는 방법을 찾았다는 사람을 보며 항상 놀란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다양한 조합을 실험해야 하고, 또 경험을 모두 기억해야 하는 그 만만치 않은 퀘스트를 어떻게 다들 깨고 있는 거지. 똑같은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나? 그걸 매번 다르게 먹겠다는 실험정신이 그렇게 투철한가. 그 맛이 다 기억 나나? 매우 신기하지만 나에게 그게 가능한 유일한 음식이 있으니, 라면이다. 그만큼 많이 먹었고 좋아한다. 그런 내가 추천하는 아이템은 식초다. 라면을 끓일 때 식초를 조금만 넣어보자. 잡스러운 싼 맛이 사라지며 끓고 있는 라면 고유의 맛을 더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라면이 약간 고급스러워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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