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마왕 스티븐 킹의 무섭지 않은 단편, 「척의 일생」
여름에는 스티븐 킹. 하품 날 정도로 단순한 공식이다. 스티븐 킹은 공포 소설의 대마왕이니 그의 소설 아무거나 읽으면서 더위를 잊을 수 있다는, 아니 그렇다고 소설로만 더위를 없애겠다는 무모한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더위는 에어컨의 힘으로 이기도록 하고, 공포 소설은 여름과 페어링 잘 되는 아이템 정도로 선택하자. 땀으로 끈적해진 팔뚝이 책장에 쩍쩍 붙는 독서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실은 겨울이 공포 소설과 더 잘 어울리는 계절이지 아닐까. ‘ 별도 없는 한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절이니까. 여기서는 ‘밤’이라는 시간에 놓인 공간의 확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공포는 어둠과 함께한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튀어나올 것 같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상태를 우리는 어둠이라 부르며 그것이 공포를 호출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형태는 지구의 자전과 함께 매일, 어김없이 찾아오는 밤이다. 그중 겨울의 밤은 유독 길지만 동시에 폐쇄적이며 배타적이다. 모든 것을 얼게 만드는 송곳 같은 겨울밤으로 우리는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게 닫혀있다. 그러나 여름밤은 우리와 공유된다. 더웠던 한낮의 태양이 사라진 시간, 사람들은 슬금슬금 그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어둠 속으로 진입하는 것은 계절이 여름이라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이 계절의 공기는 축축하고 무겁다. 저기 어딘가에서는 소쩍새가 우울하게 울고 있다. 겨울에 명징하게 보이는 오리온자리는 여름에 보이지 않는다. 열돔 현상으로 수증기가 가득한 대기는 별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음험하나 동시에 친숙한, 그렇게 우리에게 확장된 여름의 밤. 그래서 우리는 여름과 공포를 함께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 스티븐 킹의 소설에는 이렇다 할 공포물이 없다. 최근 스티븐 킹은 빌 호지스에서 홀리 기브니로 이어지는 탐정 추리물에 몰두하는 중이고, 『인스티튜트』(2019)와 『나중에』(2021)도 공포 요소를 가지고는 있지만 딱히 공포 소설이라 할 건 아니다. 『페어리 테일』(2022)은 대놓고 판타지고 『고도에서』(2018)는 휴먼 감동 드라마다! 그렇다고 공포물이 영 없을 수는 없으니 근작 중 최고로 으스스한 것을 추천하자면 『리바이벌』(2014)이 되겠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정말 공포 소설의 대마왕처럼 섬뜩하게 그려놨다. 아주 근작은 아니지만 스티븐 킹의 오랜 활동을 일직선으로 놓으면 최근 쪽에 가까운 『듀마 키』(2008)도 상당히 으스스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역시, 정말 무서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스티븐 킹의 초·중기작으로 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 어떤 작품들이 포진되어 있는지는 굳이 내가 추천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참고로 내가 가장 무섭게 읽은 스티븐 킹의 소설은 『자정 4분 뒤 Four Past Midnight』(1990) 2권에 수록된 중편 「도서관 경찰」이다.
『피가 흐르는 곳에』(2020) 라는 단편집이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서울까, 무섭지 않을까. 수록 작품당 편차가 있긴 하나 그중 정말 하나도 무섭지 않고 (서점에서 그냥 서서 읽어도 될 정도의) 짧은 단편이 있으니, 제목은 「척의 일생」이다. 이 단편은 총 세 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고, 3막부터 1막까지 역순으로 진행된다. 3막은 단어 그대로 ‘붕괴’하는 지구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지구의 종말을 앞두고 뜬금없이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이라는 글이 온 세상에 도배된다. 흥미진진한 낚시로 시작하면서 이 단편 소설은 척이라는 남자의 인생을 거꾸로 훑는다. 한 세계의 멸망과 거리에서의 즉흥 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 이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잠시의 시간을 들여 책을 직접 읽어보면 된다. 아니면 조금 기다렸다가 영화로 확인해도 되겠다. 아니 잠깐, 영화라고?
공포 시리즈의 장인 마이크 플래너건이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 <척의 일생>을 만들었다. 북미에서 얼마 전 조촐하게 개봉한 모양이지만 작년 토론토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받으며 꽤 입소문이 좋았다. 토론토에서 플래너건이 만든 스티븐 킹의 소설 원작 영화가 있는데, 톰 히들스턴이 주인공이고 그게 그렇게 괜찮다네? 했는데 제목이 <척의 일생>이라고 했을 때, 그 제목이 너무나 생경했던 나는 스티븐 킹의 오랜 팬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게 무슨 책이었더라. 왜 기억이 안 나지. 결국 책장을 뒤져 먼지를 털고 다시 읽고 나서야 “아, 이거였지.... 기억이 안 날만도 하네” 사실 깊게 인상이 남을 만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기대하는 중이다. 얼마나 재미있을까, 라기보다는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을지가 궁금하다. 3막의 스펙터클에 방점을 찍기도 뭐하고, 2막의 그 ‘순간’은 매우 아름답고 시네마틱할테지만 그야말로 순간인 데다, 결국 1막의 이야기로 영화가 마무리될 텐데, 거기에는 이렇다 할 극적 요소 없이 잔잔하고 아련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제 반응도 좋았고, 썩은 토마토 점수도 높다고 하니 영화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다. 장편영화로 각색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책을 이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그 궁금함의 거품이 꺼지기 전에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방법이 생기길 바란다.
스티븐 킹의 작품은 어느 시점에서도 영화화 소식이 늘 풍성하다. 2025년 여름 기준, <러닝맨>과 <롱 워크>가 하반기 개봉 예정이고 (<롱 워크>...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시리즈물인 <인스티튜트>와 <그것>에 대한 프리퀄도 곧 공개 예정이다. 최근 소식으로는 더그 라이먼이 대하소설 <더 스탠드>를 시리즈로 만들겠다는 발표를 했다. <척의 일생>을 만든 플래너건은 <캐리> 시리즈를 준비 중이다.
너무 덥고 습해서 언제 끝나지 싶지만, 여름은 이제 시작됐다. 여름밤과 페어링 할 스티븐 킹의 소설을 하나 선택해 오랜만에 독서라는 걸 해보는 건 어떨까. 제법 긴 소설도 많으니 여름 내내 읽겠다는 생각으로 도전해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가볍게 「척의 일생」으로 시작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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